기력 되찾은 제주 ‘용눈이’ 다시 잠들지 않길
예전 하루 4000명 탐방객
연중 흙 파이고 암반 훼손도
휴식년 기간 식생 복원 성공
“예약제·인원 제한 등 필요성”
지난 2일 제주시 구좌읍 용눈이오름. 탐방객이 몰고 온 렌터카와 관광버스 등으로 주변 도로까지 북적였던 예전과 달리 주차장은 전체 면적의 절반 정도만을 채운 차량 20여대만 주차돼 한산했다. 탐방 재개가 이뤄진 지 이틀째인 데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장마 기간인 점 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용눈이오름은 2년4개월간의 휴식을 끝내고 이달부터 다시 탐방객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제주도는 2021년 2월부터 용눈이오름의 식생 복원을 위해 자연휴식년제를 실시했고 올해 상반기 탐방로를 정비한 후 이달부터 출입금지를 해제했다고 4일 밝혔다.
예전 용눈이오름은 탐방객이 과도하게 밀려들면서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제주참여환경연대가 휴식년제 이전인 2019~2020년 측정한 탐방 인원을 보면 억새가 장관을 이루는 가을에는 시간당 최고 500명이 넘는 인원이 오름을 찾았다. 1일 3000~4000명, 한 달 10만명에 이르는 인파가 몰린 셈이다.
탐방객이 많다보니 탐방로에 야자수매트를 깔아도 금세 닳아 없어지기 일쑤였다. 용눈이오름은 경사가 완만하고 정상까지 가는 시간이 짧아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휴식년제 이전에는 개별관광객뿐만 아니라 수학여행단과 같은 단체관광객도 다수를 이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탐방로는 연중 흙이 파이고 바닥을 드러냈다. 오름 정상부는 암반이 부서지면서 깨진 돌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등 훼손 상태가 심각했다.
오름은 지반이 화산분출물인 스코리어(화산송이)로 이뤄져 잘 부서지는 특징이 있다. 탐방로를 벗어나는 이들로 인해 훼손 범위도 지속적으로 넓어졌다.
2년여의 휴식을 마친 용눈이오름은 과거와 달리 탐방로 주변으로 각종 식물이 빽빽하게 자라 있었다. 훼손이 심각했던 정상부는 야자수매트가 빈틈없이 깔렸고, 주변에는 각종 식물들이 자라 흙을 드러냈던 바닥을 촘촘히 메웠다.
다만 오름 분화구를 따라 한 바퀴 둘러볼 수 있었던 정상부 탐방로는 동쪽 방향으로 절반 정도만 개방되고 나머지는 폐쇄됐다. 동쪽 지역 정상부 역시 울타리가 생겨 탐방객이 이동하며 관람할 수 있는 구간은 예전에 비해 좁아졌다. 제주도 관계자는 “용눈이오름은 원래 사유지”라면서 “오름 소유주가 정상 부근 탐방로 출입을 일부 제한했다”고 말했다.
제주도는 용눈이오름 휴식년제가 종료됐지만 제주참여환경연대와 함께 지속적으로 오름의 식생 복원을 점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탐방로 곳곳에 ‘오름훼손지 집중조사구역’이 지정됐고, 매월 식생 현황을 관찰한다.
식생 회복의 지속 여부는 용눈이오름을 찾는 인원수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환경단체 등 일각에서는 휴식년제도 필요하지만 탐방객이 몰리는 기간에 인원을 제한하거나 예약제를 도입하는 등 오름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새별오름과 금오름, 백약이오름 등도 뛰어난 풍광이 입소문을 타면서 인파가 몰려 훼손을 우려하고 있다. 홍영철 제주참여환경연대 공동대표는 “개방을 하더라도 수용 범위 내에서 탐방이 이뤄지도록 하는 인원 관리 프로그램이 필요한데 제주도 예산과 인력 지원은 매우 부족한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박미라 기자 mr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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