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고의 없었다며 ‘준강간 무죄’ 판결…피해자 목소리 배제”
항거불능 피해자 ‘이용’에도
피고인·가담자 진술에 의존
고의성 ‘좁게’ 해석해 ‘무죄’
피해자 진술 신빙성 배척 등
재판부, 구체 이유 설명 안 해
왜곡·현실감 결여 판결 지적
대법원이 지난 4월 말 준강간 미수 혐의 피고인의 무죄를 확정한 사건을 두고 법조계와 학계, 시민사회에서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가장 보통의 준강간 사건’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종전까지는 성범죄 판결에서 강간죄 성립요건인 폭행·협박의 범위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판단한 점이 문제가 됐다면, 이번 판결에선 ‘피고인의 고의를 어떻게 인정할 것인지’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지난달 30일 법원 내 모임인 현대사회와성범죄연구회가 이 판결을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한 데 이어 4일 각계 단체들이 모인 공동대책위원회가 토론회를 열고 판결의 문제점을 분석했다.
피고인 A씨는 2017년 5월 서울의 한 클럽에서 술에 취한 피해자 B씨를 만나 경기도 외곽의 한 모텔로 데려간 뒤 성관계를 시도해 준강간 미수 혐의로 기소됐다. 준강간은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해 간음하면 처벌되는 범죄다. 당시 B씨는 만취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모텔 폐쇄회로(CC)TV엔 A씨와 A씨 친구들이 폴더처럼 납작하게 접힌 B씨를 부축해 모텔방으로 데려가는 모습이 담겼다. B씨가 심리적·물리적으로 반항이 불가능한 ‘항거불능’ 상태였던 것이다. 법원은 A씨가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해’ 간음하려고 하는 고의가 없었다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가 아니었다거나, 피고인이 피해자의 항거불능 상태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곤 했던 통상적인 준강간 사건 판결과 달랐다.
공대위가 이날 주최한 토론회에서 김진원 인천지법 판사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한다는 것의 의미는 ‘기화로’ ‘기회를 이용해 범죄로 나아간다’는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추가적인 무엇을 요구하는 게 아니지만 (해당 판결은 ‘이용해’라는 조문의 내용을) 고의의 내용으로 오해한 것 같다”며 “고의를 그렇게 좁게 본다면 고의가 인정될 수 있는 사례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 사건은 1심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돼 판결문에 상세한 무죄 판단 이유가 기재되지 않았다. 항소심에서는 B씨가 법정에서 직접 진술까지 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도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반면 피고인인 A씨의 진술은 주된 무죄 이유로 받아들여졌다. A씨는 ‘B씨의 옷을 벗기다 보면 깨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반응이 없어 시체와 성교하는 것 같을 듯해 그만뒀다’는 취지로 진술했는데, 이 진술이 무죄 판단의 핵심 근거가 됐다.
법조계에선 이번 사건을 기점으로 성범죄 사건에서 피고인의 고의를 판단할 때 더 세밀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B씨 측 대리인인 이영실 변호사는 토론회에서 “준강간의 경우엔 사건 당사자는 피해자와 피고인 두 명뿐”이라며 “피해자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동안 있었던 사실관계를 정리할 때 피고인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피고인의 진술을 판단 근거로 삼으려면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됐는지, 다른 증거와 상반되는 지점은 없는지 세세히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사건에선 피고인이나 참고인들의 진술이 구체적이지도 않고, 서로 일치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성폭력 피해자들과 연대하며 사법 시스템을 감시해온 활동가 연대자D(닉네임)는 법원이 이번 판결에서 A씨의 지인들 진술을 무죄 이유로 활용한 점도 문제라고 짚었다. A씨 지인들은 두 사람이 성관계에 동의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연대자D는 “가담한 지인들의 진술을 토대로 사건을 파악하려 하는 것은 수사기관과 법원의 현실감각이 뒤떨어진다는 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했다.
김혜리 기자 ha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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