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구단선(九段線)
중국에는 1900년도에 제작한 ‘중화국치지도’(中華國恥地圖)가 있다. ‘나라의 치욕을 보여 주는 지도’라는 이름의 이 지도는 중국 입장에선 청나라가 멸망한 교훈을 새겨 와신상담 끝에 만든 지도라고 하겠다. 그 이후에도 중국은 ‘국치 지도’를 만들어 반외세 투쟁에 활용했다. 1929년 국민당 정부도 중화국치지도를 제작했다. 지도에는 그때까지 상실한 중국의 실지(失地)를 표시했다. 당시 장제스 주석은 집무실에 이 지도를 걸어두었다고 한다. 현재 이 지도는 미국 국회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1947년 국민당 정부는 남중국해에 가상경계선인 11단선(11段線)을 그었다. 11단선은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해안선을 따라 U자형으로 그어져 있다. 이것이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의 중심에 있는 ‘구단선’으로 바뀐 것은 중국 공산당 정권 때다. 1953년 11개의 선을 9개로 줄여 새 지도를 만들었다. 구단선을 적용하면, 남중국해의 90%가 중국 영해에 속한다. 주변국들이 강하게 반발하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그중에서도 베트남의 대응은 가장 거셌다. 이번에도 구단선이 베트남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다. 4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전날 베트남 정부가 구단선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영화 <바비>의 상영을 금지했다. <바비>가 처음도 아니다. 지난해 3월 영화 <언차티드>가 같은 이유로 베트남에서 상영 금지 처분을 받았고, 2021년 7월에도 넷플릭스 드라마 <파인갭> 서비스가 중단됐다.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는 이 지역에 풍부한 천연자원이 매장된 걸로 추정되면서 불거졌다. 중국은 한나라 때 해상 실크로드였다거나 명나라의 정화 원정 등을 근거로 영유권을 주장한다. 하지만 2016년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는 근거가 없다고 판결했다. 중국은 이를 무시하고 있다. 중국이 떠받치는 뿌리는 ‘세계의 중심이 자신’이라는 중화주의다. 문제는 중화주의가 역사 왜곡과 인접국 침략 수단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중국 청년들의 문화 기원 논쟁 이면에도 중화주의가 있다. 우리는 남중국해 분쟁이 동북공정 논란과도 무관치 않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도 제2의 구단선 여파는 도처에서 계속될 수 있다.
이명희 논설위원 mins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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