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누리 칼럼] 문제는 킬러 교육이다
김누리 | 중앙대 교수·독문학
이른바 ‘킬러 문항’ 논란이 보여준 것은 대통령의 경솔한 언행과 정부 여당의 자가당착적 태도만이 아니다. 그것은 여권뿐만 아니라 야당과 시민사회를 포함하여 우리 사회 전체가 교육에 대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고 경박한 인식을 갖고 있는지, 이 사회를 지배하는 기성세대 전체가 아이들의 고통과 불행에 얼마나 무감각하고 무책임한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
논란의 쟁점들을 돌아보자. 킬러 문항은 교육 당국과 사교육 시장의 ‘이권 카르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니, 사교육을 잡으려면 먼저 킬러 문항을 없애야 한다고 대통령이 지시했다. 이에 대해 야당은 주로 대통령 지시의 즉흥성과 시점 등을 들어 예상되는 입시 혼란의 문제를 제기했고, 킬러 문항 삭제 때 발생할 ‘변별력’ 저하를 우려했다. 이처럼 논쟁은 시종일관 그저 입시와 사교육이라는 기술적인 차원의 문제를 맴돌 뿐이다. 모두가 한국 교육이 지금 이 순간 우리 아이들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킬러 문항 대신 ‘준킬러 문항’을 만들어야 한다느니, 대학 서열 체제에 아이들을 꿰맞춰야 하니 변별력을 높일 새로운 ‘묘수’를 찾아야 한다느니 떠들어댄다. 선발이 교육에 우선하다니 이런 주객전도가 어디에 있는가.
진정 놀라운 것은 시험의 난이도를 둘러싸고 논쟁이 불붙었지만, 어디에서도 한국 시험제도의 ‘기형성’에 대한 비판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선진국 중에서 대학입학 시험을 ‘기계’가 채점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만 아직도 ‘정해진 정답’을 고르는 시험을 본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라면 당연히 컴퓨터가 인간보다 우수하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질 낮은 컴퓨터’로 만드는 것이 정녕 우리 교육의 목표란 말인가. 이런 시험은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 개명한 나라에서는 아이들에게 ‘지식’을 묻기보다는 ‘생각’을 묻는다. ‘이것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이것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자기 생각을 한마디도 쓰지 않고 대학에 갈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것”이라고 독일에서 막 교육학 박사 학위를 끝내고 온 젊은 학자가 말했다. 이 나라가 아이들을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경쟁교육과 최장 시간 학습노동으로 몰아댐에도, 여태껏 학문 분야 노벨상을 받은 학자를 하나도 배출하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 무사유의 교육에 있다.
이제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육이란 무엇이고, 한국 교육의 본질적 문제는 무엇인지 캐물어야 한다. ‘킬러 문항’을 가지고 한가로이 논쟁을 벌일 때가 아니다.
교육이란 첫째, 개인의 잠재력을 ‘끌어내는’(educate) 것이며, 둘째, 인간의 존엄성(dignity)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것, 즉 자신의 존엄성을 자각하고 타인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셋째, 개인적 차원에서는 개성적인 인간을 기르고, 넷째, 사회적 차원에서는 성숙한 시민을 키우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 교육은 완전한 반교육이다. 첫째, 한국 교육은 개인의 잠재력에 관심이 없다. 아이들의 고유한 잠재력을 계발하기는커녕 머릿속에 죽은 지식을 처넣는 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둘째, 무한경쟁의 정글인 야만적인 교실에서 교육을 받은 이가 존엄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셋째, 학교를 마칠 때가 되면 개성이 만개한 자유인이 아니라 연탄공장에서 찍어낸 연탄처럼 아무런 개성이 없는 인간이 되어 나온다. 이마에 박힌 영어 점수, 수학 점수만이 유일한 차이의 표지이다. 넷째, 교실이라는 전쟁터를 뚫고 나온 전사들에게서 성숙한 시민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다. 승자는 미성숙하고 오만한 엘리트가 되고, 패자는 평생 굴욕감을 품고 사는 무기력한 대중이 된다.
문제는 킬러 문항이 아니라, 한국의 아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들”(<르 몽드>)이라는 사실이다. 문제는 변별력이 아니라, 한국의 교육이 “세계에서 가장 경쟁이 심한 교육”(KDI)이라는 사실이다. 문제는 입시 전선의 혼란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학창 시절 내내 불안과 혼돈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보낸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 아이들을 이 불행과 고통, 이 불안과 혼돈에서 구해내야 한다.
요컨대, 문제는 킬러 문항이 아니라, 킬러 교육이다. 아이들의 잠재력을 죽이고, 자존감을 죽이고, 개성을 죽이고, 시민성을 죽이는 교육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킬러 교육의 늪에서 건져내는 것 ― 이것이 한국 교육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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