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근의 낮은 목소리] 고작 설거지 한 번을 하고서
조형근 | 사회학자
“오, 북토크 한 작가님이 직접 설거지를 하시네요. 멋져요.” 누군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오늘 제가 책방지기라서요. 원래 책방지기 일인데요, 뭘.” 겸연쩍은 대답. 내가 책방지기였던 지난주 화요일 저녁, 우리 책방에서 한 기관이 주최하는 북토크가 열렸다. 나 포함 두명의 저자가 한국 사회의 불안과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저자, 사회자, 유튜브 중계 스태프, 책방 조합원들이 함께 도시락을 먹고 행사를 진행했다. 끝나고 인사를 나눌 때 나는 컵과 그릇을 챙겨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낮은 데로 임하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책방지기라 당연했을 뿐인데.
문득 스물서넛 무렵의 겨울방학, 고향집에 머물던 때 기억이 났다. 여자사람친구가 자기네 대학원 학생회가 개최하는 유명 경제학자의 특강을 함께 듣자고 권했다. 기꺼이 응했다. 한달 동안 사전 세미나도 했다. 두번째 세미나 날, 끝나고 설거지를 하려는데 친구가 말렸다. 표정이 난감했다. 그예 친구가 설거지를 했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말했다. 지난번 내가 설거지를 한 다음 대학원 학생회 분위기가 험해졌다고. 늘 여성들만 접대하고 뒤처리하는 게 맞느냐며 다퉜다는 것이다. 그 후로는 잠자코 있을 수밖에.
내가 꽤 괜찮은 남성이라고 내세우려는 게 아니다. 만약 여성이 설거지를 했다면 눈에 뜨이지도, 입에 오르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니까. 칭찬의 소재건 분란의 씨앗이건 나의 설거지가 가시화되고 발화된 이유는 당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설거지쯤은 하는 남성이 적지 않아서 특별한 일이 못 된다. 하지만 문제는 설거지보다 훨씬 넓고 깊다. 양성 간의 문제만도 아니다. 빛나는 것들 아래 빛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학계의 심포지엄을 생각해 보자. 발표자들이 훌륭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열띤 토론도 벌인다. 뉴스를 타기도 한다. 멋진 세리머니를 위해 누군가는 ‘잡일’을 해야 한다. 책상도 나르고 다과도 준비하며, 자료집도 편집하고 포스터도 붙여야 한다. 폭우 내리는 날 건물 옥상에서 플래카드를 달다가 속옷까지 젖으면 내가 왜 이 길을 선택했을까, 되뇌게 된다. 조교와 대학원생만 일하는 게 아니다. 강사도 한다. 속옷이 젖던 나는 비정규교수였다. 조교나 강사는 아무튼 급여라도 받지만, 대학원생은 대개 무급이다. 전임교수들이 수고했다며 한 말씀 해주면 고맙고, 뭐라고 한 소리 하면 맥이 풀린다.
책방 일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터인가, 책방 주인이 유명 인사들의 있어 보이는 제2의 삶, ‘부캐’ 같은 게 됐다. 연예인이, 잘나가던 기업인이, 전직 대통령이 책방을 내고 책을 권한다. 책 안 팔리는 시대에 좋은 일이다. 20년간 중고교 앞에서 책방을 한 내 부모님은 새벽 여섯시부터 밤 열두시까지 하루 열여덟 시간 문을 열었다. 무거운 책을 나르다 온몸에 골병이 들었고, 책먼지에 호흡기도 상했다. 우리 책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주일에 하루, 책 팔고 매입처리하고 설거지하는 책방지기 일은 쉽다. 큐레이션이나 납품처럼 어렵고 힘든 일들, 보이지 않는 잡일들은 상근, 반상근 조합원들이 다 한다. 유명 인사들이 책방의 잡일을 직접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 잡일 없이 그들이 반짝일 수 없다는 건 안다.
은유 작가가 쓴 ‘김장 버티기’라는 글이 있다.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고 어느 시인이 노래했는데, 찬바람이 불면 내 마음엔 커다란 김장독이 산다.” 이렇게 엄마의 김치 맛을 추억하는 작가는, 하지만 그 추억을 예찬하지 않는다. 김장을 하지 않고 사먹고 얻어먹으며 버틴다고 고백한다. 한 여성이 ‘바깥일’을 하려면 다른 여성의 돌봄노동이 필요하고, 누군가 김치 담그기에서 해방되자면 누군가의 고단한 노역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되새긴다. ‘엄마표 김치’라는 그리운 말이 실은 “넙죽 받아먹기만 하는 자들이 계속 받아먹기를 염원하는 말”이라는 걸 깨우쳐준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지불되지도, 존중받지도 못하는 이 활동을 그림자 노동이라고 명명했다. 가사노동, 돌봄노동은 물론 학생의 시험공부, 직장 출퇴근, 어쩔 수 없는 소비로 인한 스트레스, 관청에 대한 순종 등이 모두 그림자 노동이다. 자본주의는 이 그림자 노동 없이 재생산되지 않는다.
일리치의 그림자 노동,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자본-임노동관계 외부의 비생산적 노동, 그리고 이른바 잡일은 같은 범주는 아니다. 세상의 작동에 필수적이지만 주목받지도, 존중받지도 못한다는 점은 같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임금 외국인 가사도우미 도입처럼 값싸게 화폐화하여 해결하자는 허튼소리도 있고, 가치를 인정하여 사회적 임금을 지급하자는 주장도 있다. 생애 동안 잡일과 중요한 일을 번갈아 하도록 균형적 직군을 도입하자는 급진적 참여계획경제론도 있다. 대안을 두고 다퉈야 한다.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활동에서조차 잡일은 곧잘 간과되곤 한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본 어느 진보정당 당원의 글이다. “피케팅 하는 것보다 여러 피켓을 지고 나르고 다시 보관하는 일이 80프로”를 차지한다. 차가 없으니 새벽에 나와야 하고, 피켓 탓에 지옥철에서 욕도 듣는다. 운동의 대부분은 이런 시간이며, 아래로부터의 진보운동은 이런 시간을 견디는 일이라고 믿는다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잡일이 노선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잡일의 가치를 높이지 않는 진보는 허구다.
옛 철학자들의 일화가 떠오른다. 왕들의 스승이 되겠다며 주유하던 플라톤이 길거리에서 샐러드를 씻고 있는 디오게네스를 보았다. 시칠리아 왕의 초빙을 거절한 그가 딱해 보였던 걸까, 한마디 했다. “자네가 왕에게 조금만 더 공손했다면 샐러드를 직접 씻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디오게네스가 말했다. “자네가 스스로 샐러드를 씻을 줄 안다면 왕의 노예가 될 필요는 없을 텐데.” 잡일의 가치를 존중하고픈 마음은 좋은 것이다. 방법론까지 고민한다면 더 좋다. 그 잡일을 내가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면 내가, 또는 당신이 바로 이 사회의 기득권자다. 삶 자체를 고민해야 한다. 고작 설거지 한 번 했다고 칭찬을 들은 내가 책방의 ‘셀럽’들을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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