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애 칼럼] 국가 R&D, 급할수록 돌아가야 하는 이유
"최 박사, 이 곳 대덕은 명당 중 명당이오. 건설부 장관과 함께 헬기를 타고 돌아보시오."
1973년 초,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최형섭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한 말이다. 포도밭, 복숭아밭 천지이던 대덕이 세계적인 연구단지로 탈바꿈하는 시작이었다. 대덕특구는 지금까지 CDMA, D램, 한국형 원전, 누리호, KSTAR(초전도핵융합연구장치) 같은 기술을 탄생시켜왔다.
대덕특구 50년을 축하하고 미래를 얘기해야 할 과학기술계의 분위기가 싸늘하다. 대통령실은 국가 R&D 현장의 '카르텔'과 '나눠먹기' 구조를 파헤치겠다고 선언했다. 지난해부터 연이은 다누리와 누리호 발사 성공의 기쁨이 잊히기도 전에 국가 R&D는 부실과 방만, 논문 양산소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감사원은 관련 기관 감사를 시작했고, 3일 취임한 조성경 과기정통부 1차관은 "혁신을 넘어 혁명적 결단"을 얘기했다. 정부 부처들은 두자릿수 줄인 내년 R&D 예산안을 기재부에 내고, 과기정통부는 출연연 개혁방안을 만들고 있다.
매 정권 시도됐던 국가 R&D와 출연연 개혁이 윤석열 정부에선 어떤 지향점을 가질 것인가. 이번 정부의 과기분야 기조와 닮아있는 MB 정부는 과학기술 거버넌스와 출연연 혁신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당시에도 "나눠먹기" 지적이 출발점이었다. 부처 이기주의와 국가 R&D 시스템 전반의 비효율이 도마 위에 올랐다.
총대를 맨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문제를 제대로 짚었다.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를 향한 과학기술 시스템·출연연 발전방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 출연연의 떨어진 사기와 경직된 분위기, 기관장이 힘을 못 쓰는 구조를 풀어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창의성을 발휘하기 힘든 경직된 분위기 속에 사기가 떨어진 연구자들이 출연연을 떠난다는 것. 그러면서 수십년간 반복된 정부 조직개편과 출연연 구조개편이 과학계의 발전보다는 정치적 목적이나 부처 이기주의에 의해 이뤄지다 보니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나는 혁신안이 만들어지고 연구현장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고 진단했다.
위에서 잘못 끼워진 단추는 온갖 비효율과 왜곡을 만들어낸다. 당시 찾아낸 문제와 해법은 지금도 유효하다. 잘못된 평가제도가 논문과 특허 양산, 시작하기만 하면 성공하는 연구를 낳는다. 연구결과를 시장과 산업으로 이을 후속 투자는 턱없이 부족하다.
윤 전 부회장은 출연연 연구자들이 중요한 연구에 집중할 수 있게 수주형 과제를 줄이고 안정적 연구비를 늘리자고 했다. 연구자 정년은 대학과 같은 65세로, 기관장 임기는 5년으로 늘리자고 했다.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비상설 조직이던 국과위가 국가 R&D 예산 배분·조정권을 가진 상설조직으로 출범했다. 그러나 출연연 개편은 무위로 돌아갔고 정권 중반부에 뒤늦게 출범한 국과위는 힘을 못 쓰다 2년도 안돼 폐지됐다. 연구현장의 문제는 그대로 남았다.
국과위의 결말이 좋지 않았던 것은 부처 정책·사업 조정부터 예산배분·조정 모두 힘을 못 썼기 때문이다. 출범 후 대통령의 관심도 줄었고 대통령실 내에 중심을 잡아줄 조직도 부족했다. 미국의 강한 과학기술 리더십은 백악관 산하에 국과위 격인 OSTP(과학기술정책국)와 함께 OMB(예산관리국)를 두고 두 기관이 협의해 R&D 예산까지 편성하는 데서 나온다. 이번 정부도 대통령실에 과학기술수석을 두는 안을 그렸지만 현실화되지 않았다.
혁신에 특정 조직이나 집단의 이해관계가 파고들면 방향이 굴절되고 시스템은 더 꼬인다. 설계만 잘 하면 알아서 집이 지어질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도 실패의 원인이다. 혁신은 성공도 실패도 디테일이 좌우한다. 지난 2002년 빈손에서 나로호 개발을 시작해 20년 후 누리호까지 완성시킨 것은 연구자들의 집념 덕분이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조급증에 사업과 조직을 흔들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과학기술자들은 조금 거리를 두고 믿어주면서 지켜보면 누리호 같은 일을 해낸다. 자칫 다그치면 MB 정부 때 로봇물고기 같은 이상한 결과를 내놓기도 한다. 국가 R&D, 몰아부치는 대신 돌아서 가야 하는 이유다. 연구현장은 스스로 문제를 찾고 변화할 준비가 돼 있다.
안경애 ICT과학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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