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짧은 생은 기억되어야 한다
[한겨레 프리즘]
[한겨레 프리즘] 박현정 | 인구·복지팀장
2018년 3월30일 출생, 2020년 8월 사망 추정.
진짜 이름이 없었다는 ‘그 아이’는 한살 무렵부터 홀로 남겨지기 시작했다. 음식도 물도 없는 어두운 방에서 2년여 짧은 생이 끝났다. 아무도 보지 못한 죽음은 2020년 여름이 지나 겨울까지 방치됐다. 이듬해 설 연휴를 하루 앞두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주검이 발견됐다.
국제아동권리 비정부기구(NGO) 세이브더칠드런이 학대 피해 아동의 삶을 담아 펴낸 책 <문 뒤의 아이들>(2021)을 읽다 ‘그 아이’ 흔적이 있는 세 페이지를 넘기기 어려웠다. 외할머니로 알려졌던 여성이 어머니로 밝혀지면서 언론 보도가 집중된 탓에 이미 안다고 여긴 학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죽음에 앞서 위기 징후가 있었음은 알지 못했다. 보호자의 1심 판결문을 보면 2019년 11월 아이 아빠가 집을 나가고 성탄절 무렵부터 월세 23만원을 제대로 내지 못했다. 2020년 1월엔 가스가 끊겼고 2월부턴 전기 요금도 밀렸다. 가정에서 온전히 보호받기 어려웠던 아이를 우리 사회가 구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누군가 기다리다 생을 마쳤을지 모를, 우리 사회가 방치한 죽음이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 출산 기록은 있으나 출생신고가 안 된 영유아 2236명(2015~2022년생)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2018, 2019년에 태어난 영아 2명이 경기도 수원 집 냉장고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어머니는 경찰 조사에서 자녀 셋을 둔 상황에서 또다시 임신하자 경제적 어려움 탓에 범행을 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남 창원에서 2022년 3월에 태어난 아이는 생후 76일 만에 영양 결핍으로 숨졌다. 홀로 아이를 낳은 어머니는 아동학대치사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존재조차 모르던 아동들이 죽음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자 지지부진하던 출생신고 제도 개선이 급물살을 탔다. 그러나 부모에게만 아동의 출생신고 의무를 지우는 제도적 허점에 대한 지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보건복지부와 경찰청이 2019년 당시 만 3살 아동들의 안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자동차에서 생활하던 아이가 발견된다. 아이에겐 2016년, 2018년에 태어난 동생이 둘 있었다. 부모의 학대로 각각 생후 5개월, 생후 9개월 만에 숨졌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막내는 출생신고가 안 된 상태였다. 전남 여수에선 2020년 쓰레기로 가득 찬 집 냉장고에서 생후 90일 된 아기 주검이 발견됐다. 홀로 자녀를 양육해온 엄마는 2018년에 낳은 쌍둥이 남매의 출생신고를 외면했다. 주검은 쌍둥이 중 한 명이었다.
비슷한 비극이 반복되는 건 결국 문제 원인이 무엇인지,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짚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학대 피해 아동이 숨지기까지 삶의 궤적을 조사해 기록에 남긴 경우는 민간 차원에서 진행한 ‘이서현 보고서’(2014년), ‘은비 보고서’(2017년) 두 차례뿐이다. 여덟살 서현이는 2013년 울산시 울주군 집 욕조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보호자 폭행으로 양쪽 갈비뼈 16개가 골절됐고 이때 부러진 뼈가 폐를 찔러 목숨을 잃었다. 언론 보도가 줄을 이은 사건이지만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은 없었다. 당시 보고서 집필자들은 정부 조사를 촉구하며 이런 기록을 남겼다.
“하나의 거대한 구조적 원인이 아닌 여러 개의 허점과 실수, 미흡한 대응들이 서로 맞물려 한 아이가 목숨을 잃었다. 오작동하는 (아동보호) 체계의 세부사항을 계속 개선하려면 아동학대 사망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는 반드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어두운 방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그 아이’를 왜 구할 수 없었는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소리 없는 학대’인 방임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출산·양육 과정을 비롯한 아동보호체계에 어떤 허점이 있는지 면밀히 짚지 못한 탓이다. 그러므로 2년여 짧은 생은 다시 기억되어야 한다. 지금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아이들을 위해서도 서둘러야 할 일이다.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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