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이면 다 이해되는 명작 '파판16' 스토리
파이널판타지16 엔딩을 본 뒤 며칠 간 진한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해 허우적댔다. 요네즈 켄시가 부른 테마곡 Moongazing만 들으면 눈물이 핑 돌아 갑자기 지하철 사연인이 되기도 했다. 아무래도 최초로 엔딩까지 전부 본 파이널판타지 시리즈다 보니 여러모로 의미 있는 게임이었다.
전투 시스템이야 말할 것도 없이 대만족했다. 그래픽도 이만하면 괜찮고, 특히 전투 중 시네마틱 연출이 정말 좋았다. 남들 다 욕하는 서브 퀘스트도 캐릭터 배경과 세계관 설정을 풀어줘서 즐거웠다. 서브 퀘스트를 진행할 수록 NPC 대사가 달라지는 등 디테일을 잘 살렸다.
말이 많은 스토리에 관해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름 만족하는 축이다. 세세하게 따지고 보면 설명이 부족해 아쉬움이 있긴 하다. 가령 진실을 깨달은 클라이브의 심경 변화를 좀 더 자세히 묘사한다면 어땠을까. 질을 납치한 뒤 젠틀하게 그냥 돌려보낸 바르나바스의 선택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도 메인 스토리만 봤을 때는 클리셰일 지라도 충분히 일관적으로 잘 풀어냈다. 특히 신의 죽음, 신화의 종말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니체가 연상되기도 했다. 때로는 실패하지만 실패를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하는 클라이브의 생각은 니체의 초인 개념과 비슷하다.
이 기사에서는 메인 스토리 위주로 발리스제아가 왜 망했는지, 알테마는 왜 그러고 있는지, 클라이브의 선택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 자세하게 다뤄볼까 한다.
■ 축복이자 저주인 마더 크리스털
본디 발리스제아는 마더 크리스털의 가호, 에테르와 마법 아래 번영하던 세계였다. 그러나 마더 크리스털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베어러는 인간도 아닌 소모품 취급을 받으며 혹사당한다. 그들은 주인의 허락 없이는 말도 할 수 없고, 스스로 행동할 수도 없는 가축과 같다.
태어나자마자 낙인이 찍히며, 에테르를 과도하게 사용해 온 몸이 석화로 굳어 최후를 맞이한다. 베어러로 태어난 아기에 진저리치며 나라에 처분을 맡긴다. 장난감이나 편리한 도구처럼 사고 파는 것이 일상적인 존재가 바로 베어러다.
그나마 상황이 나았다던 주인공 클라이브 로즈필드의 어린 시절 로자리아 공국조차 계급 차이가 명백했다. 흑의 일대 침식이 본격화되며 사람들의 삶이 팍팍해진 이후는 말할 것도 없다. 클라이브가 시돌퍼스의 유지를 이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고자 결심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마더 크리스털은 인간에게 마법이라는 신의 은총을 베풀었지만, 지상의 에테르를 흡수해 흑의 침식을 발생시킨다는 이면을 가지고 있다. 크리스털의 안락한 감옥 속에서 천천히 죽어갈 것인가, 괴롭고 힘들더라도 감옥 밖에서 생존을 도모할 것인가. 2대 시드로서 클라이브는 모든 마더 크리스털을 파괴하기로 결심한다.
■ 자아 그 자체가 죄악인 목적 있는 탄생
그렇다면 왜 발리스제아는 이 꼬락서니가 되었는가? 간단하다. 신인 알테마가 그렇게 창조했기 때문이다.
알테마를 비롯한 그의 일족은 에테르를 사용하는 고도로 발달된 마법 문명을 이룩했다. 어느 날 피할 수 없는 종말 흑의 일대가 세계를 침식하기 시작한다. 결국 그의 일족은 고향 세계를 버리고 오리진에 탑승해 탈출한다.
오랜 시간 떠도는 과정에서 육체를 버리고 정신체로만 남게 된 채, 알테마는 아직 종말이 닿지 않은 무구한 세계 발리스제아에 도착한다. 그는 일족의 부활 '창세'를 위해 마더 크리스털과 자신의 그릇 뮈토스를 품을 모태 종족 인간을 창조한다.
알테마가 잠든 사이, 목적을 잃은 인간은 스스로 자아를 만들고 사회를 구성한다. 인간은 마더 크리스털의 에테르와 마법을 사용해 작 중 '하늘의 문명'이라 언급되는 마도 문명 제메키스를 이룩하기도 한다.
이윽고 깨어난 알테마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하늘의 문명이 멸망한 뒤, 살아있는 크리스털이자 신관으로 숭배받던 베어러와 기존 국가의 위정 집단이 충돌한다. 이 충돌이 바로 비망의 혈전이라 불리는 인간과 베어러의 전쟁이었다.
수적 열세로 진압당한 베어러를 각 국가는 노예로 규정하고 가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대륙 협약 제1조에 명시된 '베어러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구절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 신화에서 인간으로, 뮈토스와 로고스
알테마와 관련된 인물들은 클라이브를 '그릇-뮈토스(Mythos)'라 칭한다. 알테마는 신에게 반기를 든 클라이브의 행위에 스스로 '거짓된 신-로고스(Logos)'가 되려 하냐며 대단히 노여워한다. 뮈토스와 로고스, 어디서 많이 본 그리스풍 단어다.
'뮈토스에서 로고스로(Vom Mythos zum Logos)'라는 말이 있다. 서양 고대 철학이 무의식과 직관의 영역으로 그려내는 신화적 표상인 뮈토스에서 합리와 이성을 바탕으로 논리적 사고 로고스로 발전했다는 유명한 문구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번개를 제우스 신의 분노로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번개가 전기 방전으로 일어나는 자연 현상임을 알고 있다.
클라이브가 세계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알테마의 그릇으로서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길 바라는 그들이 그를 뮈토스라 칭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신화적 관점에서 신은 늘 복종의 대상이다.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자연 현상에 화를 내는 것이 의미가 없듯, 인간에게 수용 이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클라이브는 창조주인 알테마의 의지에 따르기를 거부했다. 태어난 목적대로 자아를 버리고 신의 그릇이 되는 대신 알테마를 무너뜨리고 그가 창조한 섭리를 불태웠다. 프로메테우스가 가져다 준 불씨를 받은 인간은 드디어 신으로부터 졸업하고 홀로 설 수 있게 되었다.
■ 인간으로 살고 인간으로 죽다
예속된 평화와 괴로운 자유 중에서 무엇이 옳은 선택인가? 당장의 참혹한 고통이 괴로워 안락하게 죽어가는 것을 원할 수도 있다. 실제로 베어러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클라이브를 "너 때문에 우리의 삶은 더 괴롭고 힘들어졌다"라고 원망하는 베어러도 등장한다.
하물며 인간의 본성이 무조건적으로 선한 것도 아니다. 어리석은 욕망과 탐욕으로 자멸하는 인간들은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 바르나바스가 지적하는 것처럼 에테르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해 발생하는 흑의 침식 또한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욕망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클라이브는 자아를 가진 인간으로서 스스로 걷기를 선택했다. 수많은 고통과 슬픔이 범람할지라도, 서로 의지하며 더 나은 길로 한 발씩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은 것이다. 알테마를 흡수해 세계의 이치를 고쳐 쓰는 것도 가능했던 그의 마지막 선택은 '마법도 베어러도 없는 평범한 세계'였다.
신도, 마법도, 소환수도 마지막 환상으로 남았다. 마지막 도미넌트이자 신화의 시대는 닫히고 인간의 시대가 도래했다. 언젠가 흑이라는 피할 수 없는 세계의 종말이 다가올 지라도, 인간은 살기 위해 있는 힘껏 발버둥 칠 것이다.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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