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깨달은 유럽, 태세전환…"K배터리, 핵심 파트너"
한국 의존도를 낮추겠다며 배터리 자급화를 추진하던 유럽에서 미묘한 분위기 변화가 감지된다. 전동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유럽대륙에 집중시키겠다며 추진된 자급가 오히려 한국 의존도를 키웠단 분석이 나온다. 유럽 배터리기업 주요 관계자와 전문가는 K배터리를 넘어서거나 경쟁할 상대가 아닌 유럽의 전동화에 꼭 필요한 파트너라고 입을 모았다.
요나스 헨셸(Jonas Henschel) 프라운호퍼 박사는 지난달 14~16일(현지 시각) 독일 뮌헨에서 열린 유럽 최대 에너지전시회 '더 스마트 E 유럽(The Smarter E Europe)' 행사 기간에 머니투데이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제 갓 걸음마를 뗀 유럽 기업과 배터리 선진국인 한국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면서 "전동화 과정에서 시장이 창출되고 유럽 만의 전기차·배터리 밸류체인이 완성될 것으로 기대하는데, 유럽에 진출한 한국 배터리 기업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배터리산업은 전통적인 제조업보다 훨씬 더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산업이라 생각된다"면서 "중국의 경우 대대적인 물량 공세를 통해 강력하게 부상한다는 느낌이지만, 한국·일본은 기술력을 기반으로 점진적으로 생산량을 늘려간다"고 평가했다. 이어 "한국은 기술·양산면에서 고루 경쟁력을 지녀 중국·일본과 차별화된 독보적인 포지션을 확보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헝가리·폴란드 등지에 대규모 생산라인을 구축했기 때문에 유럽의 전동화 과정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프라운호퍼는 유럽 최고·최대 응용연구 기관이다. 독일 연방정부 지원을 받는 국립연구소로 △막스플랑크 △라이프니츠 △헬름홀츠 등과 더불어 독일 4대 연구기관으로 꼽힌다. 순수·기초 과학에 주력하는 다른 연구소들과 달리 기업·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어 제조업 등 기술 기반 비즈니스에 대한 이해가 밝다. 이곳에서 전기차 배터리 기술·산업을 연구하는 헨셀 박사의 이런 진단은 K배터리 타도를 외친 종전의 태도와 상당한 거리감이 있는 게 사실이다.
헨셀 박사는 유럽연합(EU) 전기차 정책의 핵심은 역내 생산이라고 강조했다. 폭스바겐·BMW·벤츠 등 주요 완성차 회사의 거점 생산 시설이 전기차 공장으로 전환되고 이에 따른 배터리 수요가 급증한다. 이를 수입하지 않고 유럽 내에서 생산하게 해 수익을 집중시키려는 게 목적이며, 밸류체인 전반에 높은 기술 경쟁력을 지닌 한국은 배척할 대상이 아닌 유럽의 자급화에 핵심 파트너라는 게 헨셀 박사의 주장이다. 이에 국내 배터리사 관계자들은 불과 2~3년 사이에 상당한 온도차가 감지된다고 입을 모았다.
앞서 EU는 동아시아 배터리 의존도를 낮추겠단 취지로 자급화 전략을 세웠다. 글로벌 완성차 브랜드를 보유한 독일·프랑스·스웨덴·폴란드·핀란드·벨기에·이탈리아 등이 주도했다. 독일이 12억5000만유로(약 1조7000억원)로 가장 많은 투자금을 부담했고 프랑스·이탈리아가 각각 9억6000만유로(약 1조3000억원), 5억7000만유로(약 7600억원)를 투자했다. EU도 32억유로(약 4조4000억원)를 집행했다. 당시 한국이 유럽 전기차 시장을 사실상 장악하던 때여서 사실상 K배터리 배척 전략으로 해석됐다.
업계는 태도 변화의 이유로 유럽이 기술적 한계를 경험했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실제 유럽의 자급 움직임 속에 탄생한 신생 배터리 기업들도 한국을 넘어서거나 경쟁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한국·중국 기업이 주름잡는 전동화 시장에서 자신들만의 기회를 찾겠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대형 배터리기업이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전동화 시장이 확대되고 있기 때문에, 이 틈새시장을 공략하겠다는 의미로 읽혔다.
스텔란티스와 프랑스 토탈에너지 계열사 샤프트가 2020년 설립하고 현재는 벤츠도 대주주로 합류한 오토모티브셀컴퍼니(ACC) 관계자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장 밥티스트 페르노(Jean Baptiste Pernot) ACC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신생기업과 한국 배터리 기업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면서 "아시아 의존을 낮추겠다는 것은 유럽 자체적인 배터리 기술력을 확보하는 취지일 뿐"이라고 말했다. 2019년 설립된 노르웨이 배터리기업 프라이어(Freye)의 톰 아이너 얀센(Tom Einar Jensen) 최고경영자(CEO)도 "유럽 배터리 산업이 진화하는 데 있어 한국과의 협업은 불가피하다"고 언급했다.
국내 한 배터리기업 관계자는 "유럽이 자급화를 통해 한국 의존을 줄이고 전동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독점하려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면서 "이런 기조 속에서 스웨덴 노스볼트를 필두로 다수의 신생 배터리 기업이 생겨났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의 엔지니어들에 막대한 연봉을 약속하며 포섭하면서 기술력 확보를 노렸지만, 신생기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면서 "오히려 이런 시간이 K배터리의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데 주효한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논했다.
코로나19 기간 중 완성차 공급망이 흔들린 것이 유럽의 배터리 정책 기조를 변화시켰단 해석도 있었다. 프라운호퍼 레이저기술연구소(ILT)에서 수소자동차 분리막을 제품화를 추진하는 정우식 연구원은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을 겪은 유럽이 공급망 다변화·안정성 확보에 더욱 신경 쓰게 됐다"면서 "EU가 핵심원자재법(CRMA) 도입을 통해 역내 생산을 강조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소개했다.
또 다른 한국 배터리기업 관계자는 이어 "폴란드에 LG에너지솔루션이, 헝가리에 삼성SDI·SK온 등이 거점 생산시설을 마련하고 하고 주요 소재기업의 진출도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자체 생산에서 역내 생산으로 방향키를 돌린 유럽 시장을 대응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시사했다.
뮌헨(독일)=김도현 기자 ok_kd@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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