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0억원 배상”…정부, 엘리엇과의 ISDS에서 사실상 승소 [민경진의 판례 읽기]
1조 청구액 중 7% 인정
[법알못 판례 읽기]
미국계 사모펀드(PEF) 운용사 엘리엇이 “국민연금을 압박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성사시켜 손해를 입혔다”며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S)에서 한국 정부가 약 690억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판정이 나왔다.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 7억7000만 달러(약 9917억원) 중 7%만 받아들여지면서 대규모 배상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평가다.
지연 이자 등 배상금 1300억원대 예상
2023년 6월 20일 PCA 중재판정부는 엘리엇이 2018년 7월 제기한 중재 신청에 대해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 달러(약 690억원)를 배상하라”는 최종 판정을 내놓았다. PCA 중재판정부는 배상 원금에 2015년 7월 16일부터 판정일까지 5% 연복리 이자를 지급하라고 정부에 명했다.
또 엘리엇이 정부에 법률비용 345만 달러(약 44억5000만원)를 지급하고 정부는 엘리엇에 법률비용 2890만 달러(약 372억5000만원)를 지급하라고 했다. 지연 이자와 법률비용 등을 합하면 1300억원대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물산 지분 11.21%를 보유한 국민연금은 2015년 7월 10일 기금운용본부 투자위원회를 통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찬성하기로 결정했다. 이 내용은 다음날인 7월 11일 시장에 알려졌다.
엿새 뒤인 7월 17일 삼성물산이 연 임시 주주 총회에서 총 9202만3660주(총주식의 58.91%)가 합병에 찬성한다는 의견을 냈다. 2.43%포인트 차로 해당 안건의 특별 결의 요건(발행 주식 수의 56.48%)을 충족했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 지분의 7.12%를 보유하고 있었다. 엘리엇은 삼성물산 1주당 제일모직 0.35주로 제시한 합병 비율이 삼성물산 주주에게 불합리하다며 합병을 반대했다.
합병이 성사된 이후 엘리엇은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해 국민연금이 찬성표를 행사하게 함으로써 합병을 성사시켰고 이로 인해 손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이에 2018년 7월 ISDS 절차를 통해 국제 중재를 제기했다.
이번 분쟁의 가장 큰 쟁점은 정부가 국민연금을 압박한 것이 ‘국민연금의 찬성표 행사→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성사→엘리엇 손실’로 이어졌느냐였다. 엘리엇 측이 주장한 이 같은 인과 관계가 모두 입증되면 한국 정부의 대규모 손해 배상이 불가피할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그러던 중 대법원이 2022년 4월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모두 징역 2년 6개월)의 유죄를 확정하면서 정부가 국민연금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기 어려워졌다는 평가에 무게가 실리게 됐다.
하지만 2023년 1월 삼성물산 소액 주주들이 엘리엇과 비슷한 논리를 내세워 국가를 상대로 약 9억원의 손해 배상을 청구한 소송에서 패소하면서 반전의 조짐이 나타났다.
판결을 내렸던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22부는 “국민연금 투자위원회는 주식 시장과 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합병이 무산됐을 때 기금 운용에 미칠 영향 등을 고려해 독자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했다”며 “문 전 장관 등이 국민연금의 의사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인정하나 이 같은 직권 남용 행위와 주주들의 손해 사이에 상당한 인과 관계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엘리엇 “판결 인정…조속히 배상해야”
법무부는 이날 판정문을 면밀히 분석해 불복 절차 등을 검토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법무부는 그간 국무조정실·기획재정부·외교부·산업통상자원부·보건복지부 등과 합동 대응 체계를 구성해 ISDS 절차를 밟아 왔다.
법무부 관계자는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시작된 2018년부터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대응해 왔다”며 “앞으로도 국익에 부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ISDS의 판정 선고 후 판정부의 이유 불기재, 절차 규칙 위반 등의 문제가 발견되면 120일 안에 취소 신청이 가능하다.
엘리엇은 2023년 6월 21일 성명문을 내고 “중재판정부의 결론은 사실에 비춰 타당한 결론”이라며 “삼성물산 투자 관련 사실 관계는 한국의 법원과 검찰에 의해서도 지난 수년간 입증됐다”고 말했다.
엘리엇 측은 한국 정부와 재벌 간 유착 관계로 소수 주주들이 손실을 본 사실이 이번 판정으로 재차 확인됐다며 이는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검찰 재직 당시 수사를 통해 입증한 것이라고 짚었다. 이번 사건이 아시아에서 주주 행동주의 전략을 취하는 투자회사가 국가 최고위층의 부패 범죄에서 국가를 상대로 승리한 최초의 투자자·국가 분쟁 사례라고 덧붙였다.
엘리엇 측은 한국에 배상 명령 이행을 촉구하며 “판정에 불복해 근거 없는 법적 절차를 계속 밟아 나가는 것은 추가 소송 비용과 이자를 발생시켜 국민 부담만 가중시킬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엘리엇은 한국 정부가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계속 부패와 싸워 나가기를 기대한다”며 “대한민국이 보다 투명하고 믿을 만한 외국인 투자처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법무부는 2023년 6월 23일 PCA 중재판정부의 ISDS 주요 판정 내용을 공개했다. 자료에 따르면 이번 분쟁의 쟁점은 △보건복지부가 국민연금을 압박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한 것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상 국가 책임에 해당하는 ‘조치’인지 여부 △공평한 대우와 충분한 보호 등을 보장해야 한다는 한·미 FTA의 ‘최소 기준 대우 의무’ 위반 여부 △정부 개입과 엘리엇 손실의 인과 관계 △합병이 무산됐을 때 예상되는 삼성물산 주식 가치로 손해액을 산정해야 하는지 등 네 가지로 압축된다.
중재판정부는 이 중 손해액 산정 쟁점에서만 정부 측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정부는 내재 가치를 기준으로 한 엘리엇과 달리 삼성물산의 실제 주가로 손해액을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엘리엇이 청구한 7억7000만 달러(약 1조원)의 약 7%만 배상액으로 정해졌음을 고려하면 양측이 바라본 손해 규모 차가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돋보기]
10년 끈 ‘론스타 분쟁’이 대표적
국가·투자자 간 소송(ISDS)은 서로 다른 법과 제도를 가진 국제 상거래 분쟁 당사자들이 중립적인 중재인을 선임해 판정받는 절차로 ‘대체적 분쟁 해결 수단(ADR)’으로도 불린다. 재판보다 시간과 비용을 아낄 수 있어 경제적인 제도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ISDS의 대표적 사례로는 한국 정부와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의 10년에 걸친 ISDS가 꼽힌다. 2012년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첫 ISDS다. 심리를 맡은 세계은행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중재판정부는 론스타 측이 요구한 배상액 6조원(46억8000만 달러)의 일부인 약 2900억원(2억1650만 달러, 이자 제외)을 배상하라는 결론 내렸다.
이번에 엘리엇과의 1차 분쟁이 마무리되면서 정부가 외국 투자자와 진행 중인 다른 5건의 ISDS가 어떻게 종결될지도 관심이다. 2023년 1분기 중재 절차가 끝난 메이슨캐피털과의 분쟁 결과가 가장 먼저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엘리엇과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한 메이슨캐피털은 정부에 2억 달러(약 2580억원)의 손해 배상을 청구했다.
스위스 기업 쉰들러가 2018년 제기한 ISDS도 주목받고 있다. 쉰들러 측은 “현대엘리베이터가 과거 경영권 방어를 위해 유상 증자와 전환사채 발행을 추진할 때 한국 금융 당국이 이를 방치해 손실을 봤다”며 1억9000만 달러(약 2450억원)의 손해 배상을 청구한 상태다.
2021년 10월에는 이란계 다국적 기업 엔텍합그룹을 소유한 다야니 가문이 2015년 대우일렉트로닉스 인수에 실패한 뒤 계약금을 채권단에 몰취 당하자 정부를 상대로 935억원 규모의 ISDS 소송을 제기했다.
개인 투자자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ISDS도 진행 중이다. 2020년 중국인 투자자 민 모 씨는 한국에서 수천억원을 대출받은 뒤 이를 갚지 않아 담보를 상실하자 ISDS를 제기했다. 이듬해에는 미국 국적 투자자가 부산 수영구 재개발 사업 토지 수용으로 손해를 봤다며 537만 달러(약 68억8000만원)의 손해 배상을 청구했다.
민경진 한국경제 기자 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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