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레슬링계 미투’ 그 후···“피해자가 아닌 영웅이 되길 바란다”
인도 영화 <당갈>은 편견을 깨부수고 인도에 첫 국제대회 메달을 안겨 준 여성 레슬링 선수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당갈>의 주인공들이 현실에서 마주쳐야 하는 벽은 승부의 세계보다 높고 잔혹했다. 지난 반년 동안 경기장이 아닌 거리로 나가 ‘미투’(나도 고발한다) 운동을 벌여야 했던 인도의 레슬링 여성 선수들은 지금 또 하나의 벽을 깨부수려 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3일(현지시간) 인도 레슬링계에서 ‘미투’가 터져나온 이후, 선수 보호와 제도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 반년 동안 이어져 온 ‘미투’ 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여성 선수 6명과 남성 선수 1명이다. 여기에는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 <당갈>의 실제 주인공 조카인 비네시 포가트 선수(28),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인도에 최초의 메달을 안긴 삭시 말리크 선수(30) 등이 동참했다.
이들은 브리지 부샨 싱 인도레슬링협회장이 지난 수년 동안 선수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며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싱 회장은 여당 인도국민당(BJP) 소속 6선 의원이자 나렌드라 모디 총리의 측근이다.
지난 1월 포가트 선수는 적어도 10명 이상의 여성 선수가 싱과 코치들에게 당한 성적 피해를 자신에게 알려왔다면서, 문제를 제기한 선수들은 오히려 경기할 기회를 제한당했다고 밝혔다. 말리크 선수는 싱 회장이 여성 선수들을 “남자답다”고 불렀고, 레슬링 운동복을 두고 수치심을 일으키는 차별적 행동을 했다고 밝혔다.
2011년부터 인도레슬링협회를 이끌고 있는 싱 회장은 “사실이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며 자신의 혐의를 강력 부인했으나, ‘미투’ 이후 협회의 업무에선 배제됐다. 여당은 선수들의 ‘미투’운동 배후에 야당의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고 주장했다.
유명 선수들이 나섰음에도 인도 정부는 사태 해결에 미온적이었다. 지난 1월 이 사안이 처음 공론화 된 후 정부는 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밝혔지만, 조사는 수개월간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지난 4월부터 선수들은 뉴델리에서 농성과 시위를 벌였다. 9월 세계선수권대회와 아시안게임을 앞둔 중요한 시점에 훈련장이 아닌 거리로 나선 것이다. 당시 말리크 선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레슬링 선수의 일이 아니다. 선수의 임무는 훈련하고 경기하고 승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목소리를 내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며 우리는 이를 계속할 것”이라고 BBC에 말했다.
의회로 행진을 하는 도중 말리크 선수, 포가트 선수 등이 경찰에 구금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선수들은 갠지스강에 가서 “이 메달은 우리의 삶이자 영혼이다. 가해자를 두둔하는 국가 제도가 아니라 이 신성한 강이야말로 우리 메달의 완벽한 보호자”라며 메달을 던져버리겠다고 경고했다. 국제레슬링연맹도 인도 당국에 “철저하고 공정한 조사를 수행하라”고 경종을 울렸다.
결국 지난달 초 인도 정부는 빠른 조사를 약속했다. 경찰은 선수들이 낸 고소장을 검토해 싱을 기소했고, 이어 법원에서 절차가 진행 중이다. 유죄가 확정되면 최대 3년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힌두스탄타임스에 따르면, 지난달 초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66.5%는 레슬링 선수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답했다. 싱 회장을 믿는다는 응답은 17.3%에 불과했다.
시위는 잦아들었지만, 이달에 치러질 인도레슬링협회 선거를 앞두고 선수와 부모들은 여성 지도자 임명 등 제도 개선과 선수 보호를 촉구하고 나섰다. 인도레슬링협회에는 성희롱방지법이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고 규정한 고충처리위원회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두 자매를 레슬링 선수로 키우고 있는 한 어머니는 “최고의 선수들도 당한다면, 이런 일이 우리 딸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것 아닌가. 선수들은 목소리를 높임으로써 옳은 일을 했다”고 말했다. 자매의 아버지는 “우리 딸들이 피해자가 아닌 영웅이 되길 바란다. 정부는 여성 코치를 임명해 전체적인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는 여성 선수들의 훈련과 경기에 동행할 공식 보호 그룹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인도가 역대 하계 올림픽에서 획득한 메달 35개 중 7개가 레슬링에서 나왔다. 이중 6개는 2008년 이후의 성과이며, 여성 메달리스트로는 말리크 선수가 유일하다. 인도의 여성 레슬러는 5만3000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말리크 선수는 ‘미투’ 이후 인터뷰에서 “이 싸움은 더이상 인도의 여성 레슬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인도의 딸들을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서영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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