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흑해 전함들에 검정 페인트 칠… 2차대전 위장술 다시 꺼낸 이유

이철민 국제 전문기자 2023. 7. 4.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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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해군이 흑해 함대에서 사실상 기함(旗艦) 역할을 하는 에드머럴 에센(Admiral Essen) 호위함을 최근 다시 페인트 칠한 것이 위성 사진으로 확인됐다. 에드머럴 에센함은 2014년 11월 취역한 최신 전함으로, 전장이 125m에 달한다.

흑해 함대의 에센함을 비롯한 그리고로비치급(級) 전함들은 각각 8기의 칼리브르 함대지(艦對地) 크루즈미사일을 장착하고 있어 우크라이나 내륙 공격에 주로 동원됐다. 또 작년 4월 흑해 함대의 기함이었던 모스크바 순양함이 우크라이나군의 드론 공격으로 침몰한 이래, 에센함 등이 흑해 함대의 기함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우크라이나군의 폭탄 적재 무인 고속정(USV)에게 애드머럴 에센함을 비롯한 그리고로비치급 전함들은 최우선 공격 대상이다.

지난 달 함수와 함미를 검게 칠해, 실제 보다 작게 보이도록 한 러시아 함대의 호위함 에드머럴 에센함. 플래닛 랩스-민간 분석가 H I 서튼 분석/Naval News

지난달 27일 미국의 민간 군사분석가인 H I 서튼은 상업용 위성이미지 촬영업체인 플래닛 랩스의 이미지를 분석한 결과, 크림 반도의 러시아 군항 세바스토폴에 정박돼 있는 에센함의 함수와 함미가 검게 칠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전에는 함체 전체가 회색으로 동일한 색이었다. 그는 흑해 함대의 전함 3척 이상이 이렇게 새롭게 페인트칠을 했다고, 미 네이벌뉴스(Naval News)에 밝혔다.

이유는 우크라이나군이 멀리 공중이나 해상에서 관측할 때에, 어두운 부분이 바다와 겹쳐서 실제보다 작아 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군의 공격 드론에 장착된 카메라가 러시아 전함을 관측할 때에, 검은 페인트칠로 인해 함체가 실제보다 작아 보여 드론 조종자는 이를 애초 타깃이 아닌 다른 전함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에드머럴 에센함의 경우, 레이더를 보호하는 구형(球形) 구조물인 레이돔(radome)의 색도 더 밝게 칠했다.

전함에 대한 이런 기만적 위장술은 러시아 해군이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다. 지난 수십 년 간 대(大)해전이 없었던 탓에 사용되지 않았을 뿐, ‘위장 페인트칠’의 역사는 1ㆍ2차 대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대한 덩치의 전함을 안 보이게 할 수는 없으니, 적(敵)이 식별하는 데 조금이라도 어려움을 주자는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의 해군은 비스마르크 전함에 비슷한 위장 수법을 적용했다. 전함의 앞뒤를 어둡게 칠하고, 전함에 갈라지는 물살까지 그려 넣어 육안으로 보면 전체의 길이가 작아 보이게 했다.

앞뒤를 검게 칠하고 물결 모양까지 그린 나치 독일 해군의 비스마르크함./자료사진

1ㆍ2차 대전 때 영국과 미군 해군이 전함에 칠한 패턴은 더욱 파격적이었다. 애드머럴 에센함과 마찬가지로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의 패치(patch)를 섞되, 예술가 노먼 윌킨슨이 고안한 기하학적으로 헷갈리게 교차하는 ‘대즐(dazzle)’ 디자인을 적용했다.

1차 대전 때 미 해군의 화물선으로 건조된 SS 웨스트 마호멧 화물선의 함체가 형태를 쉽게 알 수 없는 기하학 디자인으로 칠해진 모습(사진 위). 아래는 동일한 상선이 대즐 페인팅을 했을 때와 회색으로 칠해졌을 때 잠망경으로 보이는 모습 비교./warfare history network

당시 연합국 전함에게 최대 위협이었던 독일 잠수함이 잠망경으로 볼 때, 공격하려는 전함의 모양이나 진행 방향을 파악하기가 어렵게 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잠수함으로서는 전함의 진행 방향과 속력을 알아야 어뢰를 미리 발사할 수 있었다. 각 전함마다 이 디자인 패턴이 달라서, 적(敵)은 ‘학습 효과’를 거둘 수도 없었다고 한다.

미 해군은 2차 대전 때, 이 대즐 패턴을 ‘메저(Measure) 31ㆍ32ㆍ33′으로 발전시켰다. 시야가 좋지 않은 멀리서 보면, 전함의 진짜 크기를 알 수 없어서 항공모함 중에서도 어느 항모인지, 어느 특정 전함인지를 알 수 없게 하고, 진행 방향도 쉽게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미 해군이 2차 대전 중에 대즐 디자인을 더욱 발전시킨 메저 32-33으로 전함을 칠한 모습. 위에서부터 세인트루이스급 경순양함, 클리블랜드급 경순양함, 오마하급 경순양함

하지만, 사실 현대전에선 레이더가 육안 관측을 대체하고, 잠수함은 고성능 소나(음향탐지기)로 타깃을 식별한다. 그런데 왜 러시아가 이 낡은 위장술을 다시 꺼내든 것일까.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공중 무인 공격기나 해상 무인 고속정과 같은 비교적 첨단 무기인 드론의 등장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무인 고속정을 원격 조종하는 측은 러시아 해군의 대응 사격을 피해 지그재그로 전속력 질주하는 보트 앞에 달린 카메라 영상을 보면서 종종 불과 수초 동안에 적함을 식별해 공격해야 한다. 따라서 러시아로서는 이 위장 페인트 칠을 통해, 자국의 주요 전함이 우크라이나군 드론에 노출되는 확률을 줄이려는 것이다. 이런 위장 페인트칠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러시아 해군으로선 ‘밑져야 본전’이다.

민간 군사전문가인 서튼은 또 지금처럼 인공지능(AI)으로 수천, 수만 장의 위성 사진 중에서 특정 패턴을 찾아 적의 전함을 식별ㆍ추적하는 방식에선, 이런 ‘원시적’ 기만술로도 인간 위성분석가가 아닌 AI는 속일 수 있다고,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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