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가 바로 창업주’인 신흥재벌 전성시대
창업주 총수 숫자 대폭 늘고 해당 기업 실적도 ‘훨훨’
(시사저널=오종탁 기자)
창업주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업을 처음 일으켜 세운 사람'이다. 오랫동안 대기업이 경제 전반을 이끌어온 한국에선 '창업주=재벌그룹 1세대 총수'로 여겨지는 게 일반적이다. 실제로 오너가 있는 국내 10대 기업(삼성·SK·현대자동차·LG·롯데·한화·GS·HD현대·신세계·CJ)의 창업주는 모두 고인(故人)이며, 산업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서 입지전적으로 기업을 일궈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국내 산업 지형이 크게 변하면서 언젠가부터 이런 등식이 깨지기 시작했다. 이는 해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하는 공시대상기업집단(대기업집단) 목록에 명확히 나타난다. 최근 회사를 창업해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창업주 총수'들이 기존 재벌그룹의 창업 2~4세 경영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올해 들어 이런 창업주 총수들의 약진은 더욱 선명해졌다. 시사저널이 올해 공정위가 지정한 자산총액 5조원 이상 대기업집단 82곳을 전수 분석한 결과 창업주 총수들의 증가세와 해당 기업들의 실적 상승세가 뚜렷이 나타났다.
10년 전 9명에서 현재 28명으로
82개 대기업집단 중 동일인(총수)이 있는 기업은 포스코, 농협, KT, HMM, S-Oil, KT&G, 대우조선해양, 쿠팡, 한국항공우주산업, 한국GM을 제외한 72곳이다. 김범석 쿠팡Inc 이사회 의장이 미국 국적이란 이유로 총수 지정을 피한 점을 고려하면 오너가 있는 대기업은 사실상 73곳인 셈이다. 공정위 지정에 포함된 72곳 가운데 창업자가 총수인 대기업집단은 28곳(38.8%)으로 나타났다. 2013년(43곳 중 9곳·20.9%)과 비교하면 20%포인트가량 증가했다.
창업자가 총수인 10년 전 대기업의 면면을 보면 롯데(신격호), STX(강덕수), LS(구태회), 동부(DB의 전신·김준기), 부영(이중근), 미래에셋(박현주), 태영(윤세영), 웅진(윤석금), 이랜드(박성수) 등 전통 산업군에 속한 곳이 주를 이뤘다. 공정위 관계자는 올해 대기업집단 지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에 대해 "전기차 등 신(新)산업이 발달하면서 대기업집단 수가 지난해보다 8개 증가했고, 비대면 시장 활성화와 해운 운임 상승으로 온라인유통·해운 업종 주력 집단들의 자산 순위가 상승했다"며 "기업집단 간 결합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성장도 대기업집단 지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산업 재편이 활발히 이뤄졌다는 말이다. 이에 따라 창업주로서 새로이 대기업 총수 반열에 오른 이도 2명(이동채 에코프로 회장, 김웅기 글로벌세아 회장) 생겼다. 이들 기업은 전년 대비 자산총액이 2조원 이상 급증했다.
지난해 대기업집단 지정 때는 재계에 더 큰 반향이 일었다. 가상자산 거래 주력 집단인 두나무가 처음 대기업으로 지정되고, 자산 순위 2위 기업이 17년 만에 현대자동차에서 SK로 바뀌는 등 지각변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국내 최대 가상화폐 거래소 업비트를 운영하는 두나무(2022년 기준 자산 순위 44위)는 공정위가 대기업집단과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자산총액 10조원 이상)을 구분한 2017년 이래 대기업집단 신규 진입과 동시에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으로 지정된 첫 사례였다.
송치형·정태순 등 경영 능력 부각
두나무 총수인 송치형 회장은 1979년생으로 2007년 서울대 컴퓨터공학부와 경제학부 졸업 후 다날, 이노무브 등에서 개발자로 일하다 2012년 4월 두나무를 설립했다. 그리고 창업한 지 딱 10년 만에 대기업 총수가 됐다. 1년 새 가상자산 거래수수료 수익과 고객예치금이 감소하면서 두나무는 올해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서 빠졌다. 그러나 송 회장의 경영 능력만큼은 합격점을 넘어 우수 등급으로 평가받고 있다.
기업분석 전문 한국CXO연구소가 6월22일 발표한 '2022년도 그룹 총수 경영 성적 분석' 결과에 따르면 송 회장은 대기업 총수 72명 중 가장 높은 영업이익률을 달성했다. 영업이익률은 그룹 매출에서 영업이익이 차지하는 비율이다. 두나무의 지난해 매출은 1조2713억원, 영업이익은 8320억원으로 영업이익률이 65.4%에 이른다.
이 밖에 다른 평가 지표에서도 창업주 총수들의 성적이 우수하게 나타났다. 우선 그룹 순이익(총이익에서 총비용을 뺀 실질 이익) 증가율에서 권혁운 아이에스지주 회장이 맨 앞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아이에스지주의 순이익은 2021년 759억원에서 2022년 3188억원으로 312.4% 뛰었다. 그룹 순이익률(순이익을 세후 순매출액으로 나눈 비율)에서는 정태순 장금상선 회장이 42.3%로 1위를 차지했다. 정 회장은 2021년 이 부문 2위(35.2%)였다가 2022년 1위에 등극했다. 장금상선의 경우 올해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으로도 처음 지정됐다.
장금상선은 그룹 직원 1인당 순익(9억9950만원)에선 고려HC(12억1350만원)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3위는 역시 창업주 총수인 권홍사 회장이 이끄는 반도홀딩스(4억4950만원)였다. 1인당 매출 1위(34억860만원) 타이틀은 대방건설 창업주 구교운 회장이 가져갔다.
그룹 매출 증가율 1위는 KG 창업주 곽재선 회장이었다. 곽 회장은 2021년 4조9833억원이던 그룹 매출을 지난해 9조1384억원으로 1년 새 83.3% 성장시켰다. KG모빌리티로 새롭게 거듭난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면서 1년 새 매출을 가장 많이 끌어올린 총수가 됐다. 자동차 산업 진출에 관해 곽 회장이 창업주 총수로서 쏟아낸 말들도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곽 회장은 지난해 7월5일 외부 행사에서 취재진과 만나 "쌍용차를 인수하게 된 마음가짐은 사명감을 뛰어넘는 소명감"이라며 "쌍용차가 제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영자의 시간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창업주 총수, 신사업·인수합병 추진 용이"
이랜드 창업주 박성수 회장은 2021년 741억원이던 영업이익을 지난해 3257억원으로 끌어올리며 정몽준 HD현대 총수(아산재단 이사장)에 이어 영업이익 증가율 2위를 달렸다.
한편 한국CXO연구소는 2021~22년 매출·영업이익·순이익 증가율 등 3개 항목 모두 30% 이상인 총수 8명을 꼽았는데, 여기에 정태순, 권혁운, 권홍사 회장이 들어갔다. 창업주 총수들의 경영 성적이 좋은 데 대해 오일선 한국CXO연구소장은 "창업 2~4세가 선대 때 정해진 그룹 사업을 계승·발전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는 반면 창업주 총수들은 좀 더 강력한 리더십으로 신사업과 인수합병을 추진하기 용이한 게 사실"이라면서 "창업주 총수가 점점 많아지는 것을 100% 좋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국가경제 성장과 산업 생태계 활성화 측면에서 분명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 총수'도 화두로
김범석 쿠팡Inc 이사회 의장은 창업주 총수지만 미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3년째 총수 지정을 피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4월25일 올해 대기업집단 지정 결과를 발표하면서 쿠팡의 동일인을 김 의장이 아닌 쿠팡㈜으로 유지했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은 브리핑에서 "제도적 미비로 외국인 동일인 지정에 관한 관련 규정이 없는 상황"이라며 "쿠팡은 김범석을 동일인으로 지정하는 데 반발하고 있고 별도 기준 없이 동일인으로 지정하면 주가 하락 등을 이유로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청구할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한 위원장은 이어 "쿠팡은 국내에 김범석의 개인회사, 친족회사가 없어 동일인을 김범석으로 지정하든 쿠팡㈜로 지정하든 규제 효과는 크지 않다"고 덧붙였다.
공정위는 2021년 쿠팡이 처음 대기업집단에 진입했을 때부터 '제도상의 미비점' 등을 이유로 김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하지 않아왔다. 대기업집단 지정자료(공정위가 매년 대기업집단 지정을 위해 동일인으로부터 받는 계열사·친족·임원·계열사 주주 현황 등의 자료)에 허위·누락이 있으면 동일인이 형사처벌을 받게 되는데, 외국인에게는 형사 제재를 내리기 어렵다는 게 골자다.
김 의장이 국내 쿠팡 계열사를 지배함이 명백한 데도 국적을 빌미로 총수의 의무를 지지 않는 것은 국내 기업과의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우현 OCI 부회장은 쿠팡 김범석 의장처럼 미국 국적인데도 2018년부터 OCI의 동일인으로 지정됐다. 외국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할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는 공정위의 설명이 모순에 빠지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해 공정위 측은 OCI의 경우 동일인의 친족이 경영에 활발히 참여해 동일인을 법인으로 바꾸면 규제 공백이 생긴다는 점에서 쿠팡과는 다르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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