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나의 과거와의 공존…“나와의 화해로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이야기” [인터뷰]
‘과거의 나’ 알리ㆍ‘현재의 나’ 알린
2인 1역 첫 만남…“닮은 모습에 깜짝”
“상처 많은 한 사람의 트라우마 극복기”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난 알리가 아니야. 알리였으면 널 죽였어.” (연극 ‘겟팅아웃’ 알린의 대사 중)
20대 중후반 즈음의 살인 전과자. 대부분의 삶을 교도소에서 보내다 출소한 첫 날이었다. 마침내 ‘새로운 시작’이었으나, 그리 들뜬 것은 아니었다. 여자의 삶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공존한다. 시궁창에 빠져 분노로 견뎌내던 날들의 그림자가 거머리처럼 따라 다닌다. 지워지지 않는 흉터처럼, 떨쳐낼 수 없는 악령처럼 존재하는 날들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칭칭 동여매 숨통을 조인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닌데, 세상은 그를 여전히 과거에 가둔다.
“무대를 마치고 나면 늘 허물이 된 기분이 들었어요. 무언가 엄청난 것이 가득 차있다가 빠져나가니 공허해지더라고요.” (유유진)
‘과거의 나’의 이야기에 ‘현재의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 이경미는 “심적으로도 갈기갈기 찢긴 느낌이 들었다”며 “바로 집에 가지 못하고 허물처럼 한참을 누워 게워내고 비워낸 뒤에야 돌아간다”고 했다.
살인죄로 8년간 복역하다 갓 출소한 여성이 세상에 나와 겪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 이경미(34)와 유유진(30)은 ‘2인 1역’으로 서로의 시간을 공유한다. 출소 이전 ‘과거의 나’ 알리는 유유진, ‘현재의 나’ 알린은 이경미가 연기한다. 마샤 노먼의 희곡을 무대로 옮긴 ‘겟팅아웃’(7월 9일까지·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다. 연극은 ‘스타 연출가’ 고선웅이 서울시극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해 내놓은 첫 작품이다.
누군가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다. 알린의 삶엔 지난 과거가 뒤엉켜 시시각각 튀어나온다. 자신을 보호하려 온몸에 가시가 돋아난 알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알린의 삶을 침범한다. 알린의 하루는 과거에 멈췄다. 주홍글씨로 새겨진 현재, 여전히 폭력적인 환경…. 배우들은 온몸으로 그들의 삶을 견딘다.
“알린은 과거의 폭력적인 자아 알리로 인해 괴롭지만, 그 아픔을 견뎌내려 굉장히 노력하고 있어요. 그것과 똑같이 배우 이경미도 알린을 연기하며 견뎌내려 노력하고 있어요.” (이경미)
■ 쌍둥이 같은 두 사람의 2인 1역
무대의 공간 구성 이 독특하다.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보여준다. 위층의 감옥과 아래층의 낡은 아파트를 통해서다. 8년의 시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 곳에 꼭 닮은 두 사람이 서있다. 막이 내리면, 객석에선 “쌍둥이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쏟아진다. 고선웅 연출은 키와 외모, 목소리까지 고려해 두 사람을 캐스팅했다.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저희 닮았죠? (웃음) 연출님이 알리가 캐스팅됐다며 ‘너 같은 애 하나 잘 뽑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이경미)
11년 전 데뷔작 ‘뜨거운 바다’를 통해 고선웅과 처음 만난 이경미는 알린 역으로 먼저 합류해, 자신의 과거를 연기할 알리를 기다렸다. 유유진은 올초 연극 ‘아마데우스’ 출연 당시 ‘겟팅아웃’의 오디션을 봤다. “너무 하고 싶어서 1막에 나오는 긴 독백을 달달 외워서 갔어요. 화내는 연기가 많았는데, 당시 있었던 스트레스를 연기하며 다 풀고 왔죠. (웃음)” (유유진)
둘은 이 작품을 통해 처음 만났다. “유진이가 너무 예쁜 거예요. 난 이렇지 않은데 어떡하나 싶었어요. 그런데 유진이가 연기하는 것을 보니, 제 눈이 있더라고요.” (이경미)
2인 1역의 연기는 묘하다.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차’가 존재하기에, 너무 닮은 것도 그렇다고 너무 다른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 고 연출은 두 사람에게 믿고 맡겼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것이 작품 내내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다. 온전히 배우들의 고민으로 만들어진 무대다.
“대본엔 ‘과거를 기억한다, 회상한다’는 지문은 없어요. 하지만 알린은 지금의 현실과 마주하면서도, 계속 해서 과거를 꿈꾸는 것처럼 떠올리고 있죠.” 악몽 같은 ‘과거의 소환’은 알린의 머릿속 기억들이다. 이 장면들을 한 공간에서 매끄럽게 연결하기 위해 이경미는 “알리의 이야기를 집중하면서 듣고, 때로는 ‘알린의 생각이니 알리는 이렇게 와줬으면 좋겠다’고 유진에게 이야기하기도 했다”고 돌아봤다. 대사 한 줄 주고 받지 않으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다. 유유진은 “경미 언니는 진지하게 연기에 임하고 캐릭터를 오래도록 깊이 생각하는 진주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 한 인간의 ‘트라우마 극복기’이자 나 자신과의 화해 과정
알리와 알린을 만난 두 사람은 또 다른 ‘출옥’을 경험했다. 무대 위에서 매순간 극복하고 싶던 순간들을 이겨내며 더 큰 세상으로 나왔다. 이 작품이 배우로도, 한 사람으로도 성장하는 시간이었다.
데뷔 12년차 이경미는 “부끄러움이 많아 무대에선 언제나 깨고 싶은 트라우마가 있었다”고 했다. 완전히 다른 존재가 돼야 하는 순간, ‘인간 이경미’가 튀어나와 움츠러들던 때도 있었다.
“매 작품 ‘이걸 해볼까, 말까’ 고민하고 갈등해요. 알린을 연기하면서도 깊이감을 가져가려 할 때 자꾸 제가 보이더라고요. 무대에서 배역이 아닌 나를 마주하면 그 역할은 흐트러지고 깨져요. 내면으로 주문을 걸면서 끊임없이 나를 지우려고 해요. 부끄러움 때문에 연기하는 감정과 배역에 손해를 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부단히 집중하려고 해요.” (이경미)
데뷔 6년차. “세종문화회관에 커다랗게 얼굴이 걸려 집안은 이미 경사”라는 유유진은 배우로의 확신을 키우며, 자신을 다듬어가는 과정이다. 인터뷰 중 그는 문득 “알리가 미워보이진 않냐”고 묻기도 했다. 많지 않은 무대 경험에도 온전히 존재감을 드러낸 이 작품은 유유진에게도 새로운 이정표가 되고 있다. 그는 “매작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쓰였는데, 캐릭터에 몰입하고 준비가 돼있으면 그런 것은 신경쓰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알게 됐다”고 했다.
연극은 ‘희망’을 말한다. 하지만 과정은 지난하다. 찰거머리처럼 따라다니는 나의 과거와 화해하는 단 ‘하루의 여정’은 한 달 같고, 일 년 같다. 이경미는 그 과정을 “아픈 상처가 많은 사람의 트라우마 극복기”이자, “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통해 진정한 자아를 만나는 이야기”라고 했다. 유유진은 대본을 볼 때마다 소설 ‘데미안’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는 “원치 않았지만, 만나게 된 환경과 상황을 깨부수고 나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경미도 공감하는 이야기였다. 그의 휴대전화엔 오래 전부터 ‘데미안’의 글귀가 적혀 있다. 힘들 때마다 꺼내보는 문장이다.
“‘대다수가 가는 길은 편하지만, 우리들의 길은 힘든거요.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갑시다’라는 문장이에요. 누구나 힘들지만, 우린 우리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어요. 제게 알린은 응원해주고 싶은 사람이에요. (관객들도) 세상의 알리와 알린에게 우리의 길을 가자며 마음의 응원을 하게 될 것 같아요.” (이경미)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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