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거둔 신라 공주 머리맡…반짝이는 비단벌레 장식이 놓였다
1600년 전 신라 도읍 경주의 쪽샘 땅속에 열살 공주는 영원히 잠들었다. 머리카락을 천으로 감고 얼굴엔 연지를 바른 채로 묻혀야 했다. 무덤 속 어린 망자의 머리맡엔 은은한 청록빛 비단벌레 날개를 붙인 꽃잎 장식판이 놓였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황인호)가 지난 2014년부터 올해 6월 말까지 발굴 조사한 경주 쪽샘지구의 5세기 신라 돌무지덧널무덤 44호분이 총체적인 실체를 드러냈다. 무덤 속 출토품들을 집중 분석한 결과 무덤 주인은 키 130㎝에 10살 안팎의 어린 왕녀(공주)로 판명됐다. 연구소는 4일 경주 시내 서라벌 문화회관에서 시사회를 열어 44호분 최종 연구성과를 발표했다.
가장 돋보였던 출토품인 비단벌레 날개 금속판 장식의 용도가 드러났다. 지난 2020년 11월 44호분의 무덤주인 머리맡에서 비단벌레 날개들을 붙인 상태로 처음 출토됐던 금속판 조각들은 대나무틀로 이뤄진 말다래(말 탄 이의 다리에 흙이 튀지 않게 안장 아래에 늘어뜨리는 판)의 표면을 채운 최고급 장식재로 밝혀졌다. 연구소 쪽은 또 직물을 감은 흔적이 있는 망자의 머리카락 다발과 금동제 장신구에 쓰인 다양한 직물류의 흔적, 연지의 재료로 공주의 얼굴과 몸에 발랐던 것으로 보이는 홍화 등도 새로이 확인했다.
비단벌레 날개 금동판 장식의 경우 2020년 조사 당시 30여점이 무덤 주검 자리 곁에서 출토된 이래 지금까지 400점 이상이 나왔다. 무더기로 나온 비단벌레 장식물들은 과학적인 후속 연구를 통해 대나무와 직물로 짠 말다래의 일부임이 드러났다. 현재는 다 삭아서 극히 일부만 남았지만, 말다래는 원래 대나무살을 엮어서 바탕 틀을 만들고 직물들을 여러겹으로 덧댄 세로 80cm×가로 50㎝ 크기의 판이었다. 이 판 위에 바로 비단벌레 날개로 만든 꽃잎 또는 나뭇잎 모양(심엽형) 장식과 금동 달개(영락), 금동 대 등을 올려 화려한 장식효과를 냈다. 영락 장식 1점에 꽃잎 모양 장식 4점이 결합해 꽃잎 모양을 구성하고, 이런 꽃잎 모양 장식 50개를 실로 이어 말다래에 공들여 붙인 것으로 파악됐다. 꽃잎 모양의 심엽형 장식은 금동판에 비단벌레 딱지날개 2매를 겹쳐 올리고 그 위에 다시 금동제 주연대(周緣帶:둘레 가장자리를 장식한 판)를 올린 뒤 실로 접붙여 만들었다. 영락 장식 1점에 심엽형 장식 4점이 결합해 꽃잎 모양을 구성했다. 이런 꽃잎모양 장식 50개가 말다래에 각각 부착돼 동아시아에 빛났던 신라 공예술의 진면목을 엿보게 한다.
말다래는 신라 회화의 화폭으로 유명하다. 경주의 천마총, 금령총, 금관총에서 나왔지만 표면에 그리거나 새기고 뚫은 천마도가 중심이었다. 비단벌레 날개를 붙인 44호분의 꽃잎 장식 말다래는 천마그림과는 전혀 다른 독창적 양식의 출현이어서 의미가 크다. 최응천 문화재청장은 “천마도가 1500년 전 신라 회화의 진수를 알려준다면 44호분 말다래는 당시 신라 금속공예 최고의 역량을 보여주는 별격의 작품”이라고 격찬했다.
한반도 고대 고분에서 거의 나오지 않은 머리카락 뭉치들이 확보된 점도 눈길을 끈다. 2020년 금동관 주변에서 너비 5㎝의 유기물 다발과 다발을 감싼 직물흔이 발견됐는데, 매핑 분석을 통해 사람 모발의 특징인 황(S) 성분이 검출됐고, 다발 주변에서 두개골 조각도 드러나면서 머리카락으로 확인됐다. 머리카락을 감싼 직물 형태를 통해 여러 가닥을 한데 묶은 당대 머리 꾸밈새도 추정할 수 있게 됐다.
금동관, 금동신발, 말띠꾸미개 등 금동제품에서는 다양한 직물 흔적들이 나왔다. 금동관 안에서는 마직물, 견직물이, 금동신발에서는 가죽, 견직물, 산양털로 만든 모직물 잔편 등이 나왔다. 금동관 안에서 홍색, 자색, 황색으로 염색된 삼색실을 쓴 삼색경금(經錦)과 금동신발 조각에 묻어나온 산양털은 국내 고대 유적에서 처음 보고된 사례다.
묻힌 이의 얼굴 부분과 허리 부분에서는 옛적 여인들이 연지 등의 화장도료로 썼던 ‘홍화’ 가루가 검출되었다. 신라 왕녀는 사후 장례를 치를 때 연지를 바르거나 뿌리고 매장했던 풍습이 있었음을 일러주는 유력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주검자리 머리맡에선 금동신발의 가림판 조각들도 확인돼 명백히 사후 의례용임을 일러준다. 연구소 쪽은 금동관과 장신구 같은 출토품과 주검자리의 크기 등 정황을 종합해볼 때 무덤 주인은 키가 130cm에 불과한 10대 신라 공주가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쪽샘 44호분은 70년대 천마총, 황남대총에 이어 2000년대 이후 신라 고분 발굴을 대표하는 무덤이다. 2014년 5월 발굴을 시작해 지난달 30일까지 실발굴일수 1350일의 조사 과정을 거쳤다. 국내 단일 고분으로는 가장 오랜 기간 발굴조사한 기록으로, 모두 780점의 유물들이 나왔다. 특히 금동관, 금귀걸이, 금·은 팔찌, 반지, 은제가슴걸이, 돌과 절구, 바둑알, 신라인 행렬도가 그려진 토기 등 중요한 일급 유물들이 쏟아져 고대 신라의 무덤 축조, 장례와 생활문화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신라 특유의 묘제인 돌무지 덧널 무덤의 조성과 축조 등 세부 건립 과정을 오직 한 고분의 발굴 조사로 온전히 밝혀내는 선례를 세웠고, 발굴현장을 돔을 씌운 전시장처럼 만들어 조사 전 과정을 일반 개방한 것도 처음 있는 시도였다. 연구소 쪽은 “보존과학, 의류직물학, 토목공학, 지질학 등 여러 학문과 협업한 연구를 토대로 신라사를 새롭게 밝혀 더욱 의미가 크다”고 자평했다.
문화재청은 현재 44호분 발굴 현장의 보존과 재활용 방안을 전문가들과 논의하는 중이다. 앞으로 국민공모를 통해 무덤에 새로운 명칭도 붙일 계획이라고 한다. 과연 어떤 명칭이 선정될 것인지가 문화재동네의 관심사로 떠오를 전망이다. 출토품은 12일까지 발굴현장에서 전시된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도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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