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컬 100] 설악·지리 태극종주 코스 개척 "남 아닌 나를 이기는 산행돼야"
힘든 걸 기피하는 세태라지만 집요하게 산을 오르는 이들이 있다. 이러한 산행 방식은 단순히 체력만 좋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산을 대하는 올곧은 태도와 이념, 탄탄한 지식과 경험을 두루 갖춰야만 안전히 산행을 마칠 수 있다. 넷플릭스 인기 예능 <피지컬100>에서 피지컬이 뛰어난 이를 탐구했듯, 월간<山>은 '산지컬'이 뛰어난 이들을 만나본다. - 편집자 주
태극종주는 산에 다니다보면 한 번쯤 들어보고, 또 꿈꾸게 되는 길이다. 태극종주란 종주코스가 지도상에서 S자 형태로 이어져 마치 태극문양인 것 같은 길들을 일컫는다. 대표적으로 지리태극, 설악태극이 잘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도 덕유산, 속리산, 소백산, 영남알프스 등지에 태극종주가 있다. 대부분 능선을 따르고, 50~100km 정도의 장거리라 산행 난이도는 매우 높다.
이 태극종주를 처음 개척한 사람이 바로 배병만씨다. 장거리종주산악회 J3클럽을 운영하는 배씨는 두 발로 직접 산줄기를 이으며 국내 장거리 산행문화를 선도한 인물로 꼽힌다. 수십 시간 동안 몇 십, 몇 백km를 걸어야만 넘을 수 있는 코스들을 만들면서 처음에는 "미친 짓"이란 얘기도 자주 들었다. 그러나 20년 남짓 흐르는 동안 하나, 둘 장거리 코스가 더 생기고 이를 걷는 이들도 늘어나면서 지금은 하나의 장르로 완전히 정착됐다.
"개척한 코스가 꾸준히 사랑받는 걸 보면 많이 뿌듯하시겠어요."
"그렇기도 하지만 사실 진짜 속마음을 말하자면 조금 씁쓸합니다."
"아니 왜요?"
"종주길이 지금은 체력단련장이 돼버렸거든요."
그는 왜 종주길이 '체력단련장이 됐다'고 하는 걸까?
배병만씨는 1966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을 묻자 '평범하고 착한' 학생이었다며 호쾌하게 웃어 넘겼다. 군대를 제대한 뒤 23세에 대구로 진출했고, 이윽고 상경해 서울에서 경호원 생활을 했다. 결혼 후 대구로 내려와 태권도 도장을 열었다가 지금은 다른 직종으로 옮겨 일하고 있다.
해외트레일 대신 한국 산
"등산은 언제부터 시작하신 건가요?"
"25세에 처음 친구로부터 산을 배웠습니다. 지금은 서울 근처 암자에 주지스님으로 있는 친구인데 당시에는 등산가이드를 했어요. 그 친구를 따라 처음 오른 산이 지리산이었죠."
심신이 단단해야 하는 직업을 주로 했었기에 산은 정말 좋은 취미였다. 처음 산에 입문한 이후 친구들과 함께 계속해서 산에 몰입했다. 그러던 와중 인터넷이 차츰 보급되기 시작했고, 2000년대 초반 '한국의 산하'라는 홈페이지가 만들어지며 등산세계가 확 넓어졌다. 홈페이지에서 많은 산을 접할수록, 오히려 그는 더 넓고, 광활한 산에 대한 목마름이 깊어졌다.
그래서 만든 것이 J3클럽이다. J3는 지리산 3대 종주(화대, 주능선 왕복, 태극)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하루에 가려면 한숨도 자지 않고 꼬박 밤새워 걸어야 하는 길들을 이름으로 삼았으니 사람들은 J3클럽이 어떤 산행을 지향하는지 단박에 알아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눈을 빛낸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이 차츰 모여 지금은 회원 수가 1만 명이 넘는다.
"J3클럽을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장거리 개척을 시작했어요. 당시에 외국 산이 좋다고 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우리나라에도 길게 걷기 좋은 코스가 많으니 함께 걸어보자는 게 만들게 된 계기죠."
"그런 장거리 극한산행이 사람들에게 어떤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셨나요?"
"그땐 막 IMF가 지나고 모두들 사는 게 참 힘들 때였어요. 그러니 이런 산행을 통해서 무엇이든지 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기원했죠. 호연지기도 키우고, 가족에 대한 고마움도 느낄 수 있고요. 그런데 지금은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된 듯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산을 체력단련장으로 여기고 있어요."
"결국 걷는다는 행위 자체는 똑같은 것 아닙니까."
"하지만 의미는 다르죠. 자기 자신을 이겨내야 하는데 자꾸 남을 이기려고 하는 겁니다. 걷는 과정에서 산을 알아가고, 배우고, 깨달아야 하는데 육체적으로 산을 정복하는 개념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물론 그런 산행 방식을 질타하거나 열등한 것으로 치부할 생각은 없어요. 단지 개척자로서 아쉽다는 거죠. 이탈리아 사람들은 커피를 아이스로 먹는 걸 보면 혀를 찬다잖아요. 그런 거랑 비슷한 감정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어려울수록, 더 어려워야
그는 그렇다고 해서 장거리 산행의 근본적인 매력이 성취욕이란 점을 부정하진 않는다. 오히려 이 성취감을 강화하기 위해 다른 장거리 산악회와는 다른 차이점을 만들었다. 바로 '무지원'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J3클럽의 종주 대원칙이다. 중간 중간 보급지점에서 다른 회원들에게 물이나 식량, 장비를 지원받으며 걷는 것이 아니라 처음 시작점에 설 때부터 끝까지 갈 식량과 장비를 스스로 짊어지고 걷는다.
"그래서 제 배낭 무게는 보통 20kg을 넘어요. 다만 이 원칙은 100km 이하 코스에서는 잘 안 지킵니다. 오히려 지원을 장려해요."
"잠깐만요. 이해가 안 되는데요. 오히려 거리가 길수록 더 지원이 필요하잖아요."
"그러니깐 어려울수록, 더 어렵게 이겨내야 더 값진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100km 이하는 극한의 도전이라기보다는 친목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고요."
그는 이를 "숯과 도자기의 차이"라고 표현했다. 숯은 굽다가 실패하면 재만 남지만, 도자기는 굽다가 중간에 실패하더라도 그 흔적이 남는다. 그러니깐 지원을 받고도 실패하면 남는 게 없고, 무지원으로 도전해 최선을 다했으면 중간에 포기하더라도 그 흔적이 분명 남는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그는 철저하게 이 원칙을 지킨다.
"힘들 땐 어떻게 이겨내시나요?"
"몸은 힘들어도 마음이 힘든 적은 없어요. 저는 그냥 '가다보면 끝이 난다' 이 생각만 합니다. 탈출하고 싶었던 적도 없어요. 3일 동안 걸어야 되는 길이면 '3일 걷자' 하는 겁니다. 육체적으로 힘들 때면 길 끝을 떠올려요. 보통 이렇게 장거리를 가면 길 끝에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 회원들이나 가족들이오. 그걸 떠올리면 참고 끝까지 가게 됩니다. 사람이 끌어내는 힘이죠."
개척에 인문을 더하다
그는 정말 무수하게 많은 코스를 개척했다. 땅끝 종주, 마창진 종주, 거제 남북 종주 등 지역을 꿰뚫는 코스부터 각 국립공원별 환종주, 혹은 국립공원'들'을 엮은 종주길을 만들기도 했다.
"개척할 때 가장 중점을 두는 건 3가지입니다. 교통편이 괜찮은가, 또 산길은 안전한가, 그리고 중간 탈출로가 충분한가. 이것들이 보장되지 않은 채 무턱대고 만들면 분명 사고가 나요. 익스트림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안전이 최우선이죠. 그래서 제가 만든 코스에선 큰 사고가 난 경우가 없어요."
초기에는 상징적인 명산들과 주능선들을 중심으로 코스를 만들었는데, 최근에는 다소 그 성격이 달라졌다. 하천이나 역사를 따르는 길들이 주를 이룬다. 비법정탐방로에 대한 단속과 인식이 그가 처음 길을 개척할 때와는 사뭇 달라졌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산 공부를 다시 하면서 얻은 깨달음을 반영했다"고 했다.
"2016년에 모 단체에서 산에 대해 강의해 달라고 연락이 왔었어요. 열심히 준비해서 중학생인 아들을 앉혀놓고 시범 강의를 해봤죠. 한 5분 지났을까요. 아들이 지겨워서 견디질 못하더라고요. '우리가 산에 대해 뭘 알아' 라면서요. 아차 싶더라고요. 바로 단체에 전화해서 제가 갖고 있는 지식으로는 강의가 힘들겠다고 무기한 연기 요청을 했어요. 산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리고 시작한 게 강 따라 걷기다. 산을 안이 아니라 밖에서 보기 위한 결단이었다. 낙동강과 한강, 영산강 금강 등 100km가 넘는 하천 17개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코리아둘레길이 만들어지기 전, 해안선과 DMZ 탐사도 마쳤고, 이름 있는 하천 168개를 모두 걸었다. 물이 있는 곳에 으레 문명이 발상하다 보니 이 과정에서 1개 특별시, 2개 특별자치시, 6대광역시, 75개 시, 82개 군, 69개 구를 모두 주파했다. 그리고 다시 대간에 들어섰다. 진부령에서 지리산까지 22일에 걸쳐 한 번에 종주했다. 그중 17일이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저녁에 내려와 산 밑 모텔에서 드라이기로 신발과 양말을 말리고 두 시간 정도 눈을 붙인 뒤 다시 일어나서 대간을 타는 나날이었다. 또 다음엔 백두대간의 둘레를 둘러봤다. 2,000km를 세 구간으로 나눠 대간에 수없이 많은 골들을 지독하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수경과 산경을 같이 보니 산만 다닐 때는 배우지 못했던 걸 알 수 있게 됐다"며 "다시 말해 산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산을 똑바로 본다는 게 선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산이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인문'입니다. 단순히 자연적, 지리적, 지형학적, 미학적인 '형태'에 매몰되지 않고 그 산에 깃든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걸어가며 봐야 합니다."
재미있는 산행에서 의미 있는 산행으로
자연지리적 등산에서 인문지리적 등산으로 노선을 바꾼 그가 만든 길들은 이런 것이 있다. 5대, 8대 적멸보궁을 잇는 부처님 진신사리길 760km, 송광사와 해인사, 통도사를 잇는 삼보종찰길 340km, 가장 최근에는 팔만대장경이 옮겨진 길을 추적해 걷는 이운길 520km 등이다.
물론 이 길들은 대부분 우리가 산행에서 얻길 바라는 장쾌한 조망이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다. 조금 더 거칠게 표현하자면, 재미가 없다.
"역사와 인문을 중시하는 분들도 있지만 상당수 분들이 풍경이 아름답고 예쁜 산과 길을 더 선호하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럼에도 그 길을 만들어 걸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산지체계 인식의 기본은 산경표입니다. (산경표는 한반도 지형을 산줄기와 하천 줄기를 중심으로 파악한 책이다. 조선 영조 때 여암 신경준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산경표를 비롯해 조상들이 대동여지도, 동국지도 등을 만든 목적은 등산이 아닙니다. 산과 하천의 모양과 줄기가 인문과 역사를 형성하니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 만든 거죠. 그러니 인문을 빼고 산을 얘기할 수 없는 셈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산을 판단하는 가치척도가 '예쁜지'가 대부분이죠. 얼마나 '의미'있는지는 뒷전이고요."
그는 트레일러닝을 하지 않는단다. 뛰는 데 집중하다보면 반드시 놓치고, 걸어야만 보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철저히 단독행을 지향한다. 그는 "누군가와 같이 가면 떠들다가 정작 봐야 할 것, 생각해야 할 것들을 다 놓치게 된다"고 설명했다.
"장거리 산행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이 있으면 늘 단독행을 해보라고 권하고 있어요.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는 해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완주했을 때 성취감은 두 배가 되죠. 포기해도 괜찮아요. 그저 자기가 배낭에 넣은 만큼 가보는 거죠. 이겨내고 날머리에 우뚝 섰을 때 자기 자신이 오롯이 보일 겁니다."
생리대가 등산 장비?
"넣은 만큼 간다고 하시니 배낭에 어떤 걸 넣고 다니시는 지 궁금한데요."
"평범합니다. 물은 기본적으로 500ml 생수통 6개 정도 챙깁니다. 그리고 산행하면서 샘터에서 보충하죠. 추가로 보조배터리 5개, 헤드랜턴, 건전지, 돗자리, 침낭, 갈아입을 옷, 여유 신발 정도죠. 식사는 빵과 마른반찬, 그리고 미리 전자레인지에 돌려놓은 햇반으로 합니다."
그중에서 특이한 것이 두 개 있다. 하나는 파이어스틸. 그는 "저체온증이나 유사시를 대비해 늘 지니고 다닌다"며 "일반인이 파이어스틸을 사용해 본 적 없으면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을 훼손할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나름의 선택"이라고 했다. 또 다른 하나는 생리대다.
"생리대를 왜 사용하시는 건가요?"
"400~500km 이상 코스를 한 번에 걸을 때 주로 챙겨요. 다른 용도가 아니라 물집 때문입니다. 워낙 장거리에 배낭 무게도 무겁다 보니 늘 물집과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발바닥 하중이 엄청나거든요. 그러니 온갖 방법을 다 써요. 깔창을 빼고도 걸어보고, 양말을 안 신고도 걸어보고, 두 켤레 신고도 걸어보고 하는데 저는 깔창 빼고, 양말 벗고, 생리대를 넣고 걸을 때 효과를 좀 보는 편이에요. 물집이 생길 조짐이 있는데 무시하면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나중엔 방법이 없어져요."
고생을 즐긴다? 고생을 이기는 걸 즐긴다!
"그렇게까지 힘들게 걸으면 주변에서 '왜 고생을 사서 하나'란 소리는 안 들으시나요."
"하하. 안 그래도 형수님이 한 번 그런 얘길 한 적이 있어요. 저는 '안 해보면 모른다'고만 했죠. 일반인들은 모르겠지만 산꾼이라면 기본적으로 고생에 대한 갈증이 있죠. 특히 백두대간을 한 사람들은 그 길에서 정말 온갖 고생을 다 겪었는데도 일시종주기가 올라오면 눈을 초롱초롱 뜨는 법입니다. 물론 고생 자체를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그 고생을 이겨내는 순간 몸과 가슴에 무언가가 한가득 차오르는 그 경험을 좇는 거죠."
"백두대간이라고 하면 또 비법정탐방로 때문에 곤혹스럽지 않습니까."
"예민한 문제를 짚으시네요. 사실 제가 초기에 만든 코스들도 일부 비법정탐방로 구간이 있습니다. 이젠 그래서 그 부분을 건너뛰거나 안 가는 추세인데 아무래도 백두대간은 얘기가 다르죠."
"어떻게 다른가요?"
"그 의미가 너무 남다르고 우회하는 방법도 너무 작위적이잖아요. 답이 없는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저는 비법정구간인 설악산 황철봉에 국립공원공단이 설치한 야광 띠지를 보면 어느 정도 정답이 있다고 봐요. 이게 어떤 뜻이냐면 '혹 여길 지나간다면 조난당하지 말라'는, 즉 최소한의 안전을 위해 만들어 놓은 거거든요. 안 가는 것이 좋지만, 간다면 조용하게 안전히 가라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공단 직원들을 악마화하는 건 나쁘다고 봅니다. 이분들도 산꾼들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무던히 애를 쓰거든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좀 돌아봐야죠. 그런 비법정탐방로로 들어가서 라면 끓이고, 고기 굽고, 쓰레기 버리면서 산을 엉망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산 넘고 물 건너는 그의 산 얘기는 끝이 없었다. 돌고 돌던 이야기는 어느덧 다음에 개척하려는 코스와 자신의 뒤를 이어 국토에 의미 있는 족적을 이으려는 사람들에게까지 닿았다. 문득 그는 왜 이렇게 개척에 열을 올릴까 궁금해졌다. 미국 서부개척시대처럼 길 끝에 일확천금이 감춰져 있지도 않다. 또 공명심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랬다면 힘을 자랑하기 위해 억지로 산길을 새로 뚫고 어려운 길을 만들었을 텐데 그는 단지 묵은 산길을 재정비하고 거기에 감춰져 있던 의미를 드러낼 따름이다.
"제 뒤를 걷는 사람들이 있으니 좋은 길을 함께 나누고 싶은 게 가장 큰 동기입니다. 제가 선답자로서 틀린 길을 갈 수도 있어요. 그럼 그걸 바탕으로 다른 분들이 맞는 길을 내겠죠. 그 길들이 계속 이어질 겁니다. 그리고 그 길 위와 끝에서 저마다 어떤 의미를 찾아낼 테지요."
월간산 7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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