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락 9개 없이 지맥 9,000km 2년 만에 완주
사고 전 국가대표 울트라 마라토너, 2010년 에베레스트 등반 중 동상
그는 아마추어 마라토너 중 최강이었다. 국내 최초 서브쓰리(3시간 이내) 페이스메이커였으며, 국내 대회는 물론 국제 대회까지 출전했다 하면 우승을 거머쥐었다. 서울 26개 산 일시종주, 불수사도북 최단시간 완주 등 트레일 러닝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누구도 멈추지 못할 것 같던 쾌조의 진격은 뜻밖에도 2010년 에베레스트에서 비극적인 사고로 멈추게 된다. 정상 공격에 나선 후배 대원을 같이 데리고 돌아가려고 장시간 대기하다가 동상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고 발가락 9개를 잃는다.
하지만 그는 실의에 빠지지 않고 재활을 거듭했다. 그리고 12년이 흐른 지난해 8월. 우리나라 산줄기 대간·정맥·기맥·지맥 1만2,931km를 완주했다. 산악계와 러닝계에선 '킹드래곤'이란 닉네임으로 잘 알려진 윤왕용씨의 이야기다.
사고 후 다시 등산하기까지 5년 걸려
국제물류회사인 우원해운항공 대표인 윤왕용씨가 달리기를 시작한 건 2002년 봄이다. 직장 일로 바쁜 탓에 운동을 거의 하지 못해 몸이 부쩍 무거워졌다고 느꼈다. 그래서 동네 앞 공원 운동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5바퀴, 10바퀴에서 곧 25바퀴가 됐다. 잇달아 15층 사무실과 9층 아파트를 뛰어 오르내렸다. 두 달 뒤 출전한 마라톤 대회에선 10km를 50분 11초에 뛰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그는 국내 최초 서브쓰리 페이스메이커가 됐고, 제주 200km, 남산 100km 등 주요 울트라마라톤 대회도 우승했다. 또한 검단산부터 아차산까지 서울 26개산 220km를 55시간 24분에 완주했고, 일본 울트라마라톤 대회 250km도 26시간 37분으로 1등을 기록했다. 산악마라톤 국가대표로도 선발됐다.
"그때는 나갔다 하면 우승이었죠. 제가 마라톤 초반보다 후반에 강한 스타일인데 그러다보니 울트라 마라톤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어요."
대학 산악부 출신이었기에 산도 늘 그의 도전의 대상이었다. 울트라 마라토너의 체력이 있으니 고산등반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봤다. 그래서 먼저 2009년 키르기스스탄 레닌봉을 홀로 등정했다. 조난당해 간신히 생환하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어쨌건 등정은 성공했다. 그러나 이듬해, 에베레스트에서 재차 비극을 겪는다.
"제가 원정대장이었어요. 정상 등정할 체력이 확실치 않은 대원이 있었는데 정상을 올려 보냈죠. 제 책임이란 생각이 들어서 끝까지 케어해서 데리고 내려가려고 해발 8,500m쯤 되는 발코니에서 5시간을 기다렸어요. 다행히 그 대원은 정상을 잘 다녀왔는데 문제는 저였죠. 손발 모두 동상을 입었고, 발가락은 9개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그는 한동안 휠체어를 타고 목발을 짚었다. 다시 운동을 할 수 있으리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좌절감에 빠져 몸이 망가졌다. 그래도 조금씩 체력이 회복되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스키도 타고 골프도 쳤다. 발가락이 없으니 체중 이동에 적응이 안 돼 애를 먹었다. 그리고 산에 대한 갈증을 품었다. 소속 산악회(바름) 산행을 따라가 처음에는 중간 보급 지원만 했다. 그러다가 몸이 괜찮은 것 같아 산행을 같이 했는데, 얼추 됐다. 괜찮았다. 산을 오를 수 있었다. 문장으로 축약됐지만, 여기까지 5년이나 걸렸다.
"점점 몸이 회복되면서 다시금 목표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만 생각해 보니 에베레스트 가기 전에 1대간 9정맥 6기맥을 완주했던 게 떠올랐죠. 162지맥도 10개 남짓 해둔 상태였죠. 그래서 이 지맥을 마저 완주하자고 생각하고 장거리 산악회 '무한도전클럽'에 가입했어요. 2020년이죠."
3년도 채 안 걸려 162지맥 완주
이처럼 목표를 갖고 걷고, 달리게 된 건 사고 이후 딱 10년 만이었다. 발가락이 없는 상태에서 그 길고 길 없는 지맥을 타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오르막은 큰 문제가 없었는데 문제는 내리막. 잘린 발끝이 앞으로 쏠리며 딱딱한 등산화에 계속 부딪치는 게 끔찍하게 고통스러웠다. 또 가만 놔둬도 잘린 부분에 굳은살이 갈라져 피가 나기 일쑤였다. 그래서 늘 테이핑을 해야 했다. 야간에 홀로 산행하다 가시잡목에 파묻힌 채 길을 잃어 울고 싶은 마음에 주저앉아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하지만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매주 지맥을 향했다. 보통 금요일 밤에 내려가서 토요일 새벽부터 걷는 무박 2일, 혹은 일요일까지 무박 3일로 했다. 하루에 두 개 지맥을 동시에 하는 건 다반사였다. 한여름에 육백지맥과 사금지맥을 연계해 120km를 한 번에 끝내기도 했다. 그렇게 꼬박 2년을 채우고 몇 달을 더한 2022년 8월 27일, 우리나라 산줄기 완주를 마칠 수 있었다. 162지맥은 8,932km다.
"정말 치열한 도전이었습니다. 완주하고 나선 긴장이 풀려서인지 체중이 확 불었어요. (웃음) 그래서 지금 다시 몸을 만들고 있습니다. 새 목표가 생겼거든요."
그는 "가까이 8월에는 4박5일 일본 중앙알프스 종주, 멀리는 2025년 미국 최고봉 데날리 등반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왜 그토록 도전을 멈추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간단히 "좋아서"라고 응수했다.
"내가 열중하는 것,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해야죠. 인생은 짧아요. 대신 무턱대고 바로 자기 수준에 맞지 않는 것에 도전하면 안 되죠.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야 됩니다. 결과는 과정에 의해서 만들어져요."
월간산 7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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