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광장] 변별과 헤어질 결심
중학교 평준화가 이뤄지기 전 1960년대 초반에는 '국6병'(치맛바람)으로 알려진 중학교 입시전쟁이 치열했다. 깊어져 가는 입시 과열을 식혀보고자 문교부는 특단의 대책으로 내가 치른 1963년 중학 입시를 국어, 산수 달랑 두 과목만 그것도 교과서 내 출제로 제한했다.
많은 학생들은 교과서를 통째로 외웠고, 당시 일류중학교 당락은 어차피 필기시험은 (거의) 모두가 만점일 테니 체력장에서 판가름 난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요즘 말로 하자면 당시 중학 입시의 킬러 문항은 달리기, 턱걸이 등이 되겠다. 시험문제는 쉬웠지만(?) 필기시험에서 실수하지 않기 위한 과외 열기는 더 뜨겁게 타올랐다. 지금의 킬러 문항 타령을 보며 드는 씁쓸한 추억이다.
그로부터 한 갑자(60년)가 지났지만 우리 교육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사교육은 학벌 경쟁, 수직적 대학 서열로 극도로 좁은 입시 병목, 입시제도의 후진성 등 여러 요인의 복합적 결과일 뿐, 그때나 지금이나 시험의 난이도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문제가 어려우면 고난도 문제를 풀기 위한 훈련, 쉬우면 실수하지 않고 더 빨리 풀기 위한 훈련이 기다린다.
사실 사교육 시장을 키우는 가장 좋은 온상은 입시 문제들의 난이도가 아니라 교육부 입시 정책의 변화 그것도 급침 변경 아니겠는가. 사교육 업계에게 바뀌는 입시제도, 불안한 학부모, 당황한 학생보다 더 쉬운 먹잇감이 있을까? 얼마 남지 않은 올해 수능의 모습이 흐릿하여 학교, 학부모, 학생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이미 사교육 업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쁘게, 즐겁게, 그리고 자신 있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이미 오랫동안 많은 학부모와 학생들을 괴롭히던 정체가 모호한 킬러 문항은 이제 교육부 수능 담당 국장과 교육과정평가원장을 킬하고 이제 자신마저 킬하려 하고 있다. 킬러 문항이 교육부 예고대로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고 나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킬러 문항은 그 정체가 모호하듯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 변별이 낳은 괴물이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 수능이 변별과 이별하지 못하는 한, 킬러가 사라진 자리는 더 많은 준 킬러가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지켜야 할 것은 수능 난이도의 높낮이가 아니라 일관성이요, 죽여야 할 것은 킬러 문항이 아니라 킬러 문항을 강요하는 변별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변별인가? 교육은 시험이 아니다. 시험은 그동안 배워온 교과과정에 대한 개별적 이해도, 성취도 측정으로 다음 단계로의 성장을 돕기 위한 여러 교육 지표 중 하나이지, 친구와의 키재기로 45만여 명을 한 줄로 세우는 변별이 아니다. 변별은 배제이자 차별이요 사람을 1등급-9등급으로 가르는 낙인이다.
국가가 나서 일부 대학이나 일부 전공의 선발 편의를 위한 변별력 타령을 읊조리면, 대학은 무임승차로 자신들의 교육과정을 개혁할 내적 동기를 잃어버린다. 수능은 이제 변별과 이별할 결심을 하고, 대학은 지난 명성과 수능 변별력에 크게 기대온 우수 신입생 확보 경쟁을 버리고, 교육과정 수월성으로 우수 졸업생 배출을 위한 진검승부를 해야 한다.
21세기도 이미 거의 사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아직도 20세기 산업화 시대에 고착된 우리 교육이 '킬러 문항', '변별력', '일타 강사', '사교육' 등과 씨름하고 있을 때, 전 세계 교육은 큰 문제의식으로 대변혁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앞세운 초연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변별력은 유지하되 교과과정 안에서 출제하라"는 정부의 말은 "우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직업을 위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기술을 사용하여, 아직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는 문제를 풀도록, 학생들을 준비시키고 있다"는 미국 클린턴 행정부 교육부 장관 리차드 라일리의 말 앞에 얼마나 초라한가.
'변별과 헤어질 결심' 수능 정상화의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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