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칼럼]‘21세기의 패배자’ 러시아

여론독자부 2023. 7. 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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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드 자카리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푸틴, 현대화·창의적인 생산 외면
러시아 자원 파먹는 국가 만들어
세계서 가장 빠르게 불평등 심화
'반란' 통해 지배층 균열도 드러내
[서울경제]

새뮤얼 헌팅턴은 저서 ‘제3의 물결’에서 사회 지배층인 엘리트의 균열은 독재 정권이 약화되고 있다는 신호라고 지적했다.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체제 이탈은 일련의 중대한 변화를 촉발한다. 반대로 체제 내부의 이탈 현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독재자는 권력을 유지한다.

지금 러시아에 헌팅턴의 원칙은 어떻게 적용될까.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공격 실패는 러시아를 지배하는 엘리트 간의 마찰을 시사한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불과 하루 이틀 만에 사태를 수습했다. 프리고진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크렘린의 핵심 인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프리고진은 돈키호테식의 비현실적인 모스크바 진격을 중단했다. 푸틴 대통령은 재임 중 진보 진영에 있는 반대 세력을 분쇄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민족주의 진영의 도전자들까지 제압해야 한다.

러시아의 권력 다툼은 ‘어두운 공간’에서 일어난다. 이 말의 원조는 윈스턴 처칠이다. 그는 “크렘린의 권력 다툼은 양탄자 아래서 진행되는 개싸움과 흡사하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듣는 것이라고는 으르렁대는 소리뿐이다. 양탄자 아래에서 뼈가 삐져나와야만 승자가 누구인지 비로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지금 비유적으로 프리고진의 뼈를 목격하고 있지만 아마도 조만간 그의 뼈를 실제로 볼 것이다.

러시아 사회의 현 상황은 양탄자 아래의 개싸움과 달리 외부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필자는 최근 러시아인의 평균 수명에 관한 통계를 접한 후 큰 충격을 받았다. 인구학자 니컬러스 에버스탯의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발생 이전인 2019년 세계보건기구(WHO)는 15세 러시아 소년의 잔여 수명을 53.7년으로 추산했다. 이는 동갑인 아이티 소년의 기대 수명과 동일하며 같은 나이인 예멘·말리·남수단 소년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올해 15세인 스위스 소년의 잔여 수명은 러시아 동갑내기보다 13년 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러시아가 천연자원 부국이자 도시화와 산업화를 달성한 사회로 일반 대중의 교육 수준과 반문맹률이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높다는 사실이다. 교육은 보통 건강과 상관관계를 보이지만 러시아의 경우는 예외다. 에버스탯은 러시아가 교육 수준으로 볼 때 세계 일류 국가에 속하지만 근로 연령 인구의 사망률은 ‘4류 국가’ 수준이라고 지적한다.

교육성취도를 살펴보면 더욱 이해하기 힘든 사실이 있다. 러시아는 특히 과학 분야에서 거대한 숙련 인구를 거느리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지식 경제는 옛소련 시대에 비해 퇴보했다. 2019년 러시아의 국제특허신청 순위는 오스트리아보다 한 단계 아래였다. 러시아 인구는 오스트리아의 16배다. 현재 러시아의 연례 미국 특허취득 순위는 앨라배마주와 동률이다. 러시아 인구는 앨라배마주의 30배에 달한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도시 출신의 교육 받은 러시아인들이 대거 국외로 탈출했기 때문에 이 같은 상황은 더욱 악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놀라운 러시아의 부조화를 어떻게 설명할까. 알렉산더 에트킨은 저서 ‘현대화를 외면한 러시아’에서 푸틴 대통령이 창의적인 생산을 외면한 채 러시아를 부존자원을 파먹고 사는 기생충 국가로 만들었고 국민 복지 측면에서 현대국가에 요구되는 기능을 단 하나도 수행하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지배층의 배를 불리는 도둑정치의 내재된 특성은 부패다. 에트킨에 따르면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사회의 불평등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2011~2012년의 반푸틴 시위 이후 러시아 정부의 반현대화 기조는 더욱 강화됐다.

푸틴 정권에 서방은 러시아를 전염시킬 현대화의 사회·경제·정치적 세력을 대표한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하면서 행한 연설에서 푸틴 대통령은 “미국이 러시아의 전통적 가치를 파괴하고 퇴보와 퇴화로 직결되는 반인간적 가치를 강요하려 든다”고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에게 러시아의 현대화는 능동적인 시민사회와 개선된 의료 제도, 평범한 시민에 대한 기회 확대 쇠퇴를 의미한다. 그는 종교와 전통적 윤리, 인종혐오와 엄격한 성별 관습에의 순응을 강조하는 전통적 러시아를 옹호한다.

이들 모두를 합한 결정체가 무엇일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러시아의 가장 큰 문제가 우크라이나전에서 패하고 있는 것보다 21세기의 패자가 되고 있다는 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여론독자부 opinion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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