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마니아 푸틴의 ‘두려움’…내란의 1917년 언급, 왜

이본영 2023. 7. 4.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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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반란·10월혁명 등 극적인 사건 점철된 해
내란으로 큰 위기 닥쳤다는 인식 드러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러시아 최남단 다게스탄공화국을 방문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푸틴 대통령은 항상 책을 읽는다. 대부분 러시아 역사에 관한 것이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러시아 대통령궁) 대변인이 2011년 <로이터> 통신에 한 말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중요한 행사와 결정적 고비 때 러시아 역사를 끄집어내곤 한다. 예부터 무엇이 잘못돼 그런 상황에 처했는지, 문제를 바로잡고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한다.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하면서는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일부’라는 연설로 전쟁을 정당화했다. ‘역사적 사명’을 강조하는 점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뜻하는 ‘중국몽’을 부르짖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닮았다.

그런 푸틴이 지난달 24일 바그너(와그너) 그룹의 반란에 직면하자 ‘1917년’의 반복을 막아야 한다며 100여년 전 역사를 상기시켰다. 푸틴이 그때를 거론한 이유는 뭘까?

100년 전 악몽에 시달리는 푸틴?

푸틴은 텔레비전 연설에서 당시의 혼란은 “러시아가 1차대전에서 싸울 때 큰 타격을 입혔고, 승리를 도둑맞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또 “군대와 인민의 배후에서 발생한 음모, 논쟁, 정치 공작은 최악의 재앙이었고, 군대와 국가를 파괴하고, 엄청난 영토를 잃게 만들고, 내전의 비극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1917년은 러시아가 겪은 격동의 20세기 중에서도 매우 드라마틱한 사건들로 점철된 해다. 1차 세계대전을 이끌던 차르 니콜라이 2세가 막대한 사상자와 경제 붕괴 탓에 발생한 2월혁명으로 쫓겨나며 로마노프 왕조가 막을 내렸다.

8월에는 군 총사령관 라브르 코르닐로프가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임시정부 체제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10월혁명으로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다. 볼셰비키 권력은 이듬해 3월 영국·프랑스·미국 등이 참여한 연합국 진영에서 이탈해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등과 단독 강화조약을 맺었다. 볼셰비키혁명은 1923년까지 이어질 내전을 촉발했다.

푸틴은 이런 상황을 축약한 것이다. 잇따른 혁명과 내란이라는 적전 분열이 러시아를 약화시켰고, 결국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라는 굴욕적 강화조약으로 이어졌다는 인식이다.

이를 러시아 전체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사력을 다하는 지금 상황에 빗대 내란이 발생해 큰 위기가 닥쳤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러시아인들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전투는 모든 군대의 단합을 필요로 한다”며, 바그너 그룹의 반란은 “러시아와 러시아인들 등에 칼을 꽂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푸틴의 연설은 1917년 상황 전반을 아우른다고 보이지만, 바그너 그룹의 반란에 대한 반응인 점을 고려하면 코르닐로프의 반란에 초점을 맞춰 볼 수도 있다. 코르닐로프는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국내적 안정과 불순분자 제거가 필요하다며 총구를 돌려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한 당시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진격했다. 그는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위한 행동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를 쿠데타로 받아들인 케렌스키는 그를 해임했다. 전쟁에 심한 염증을 보인 러시아인들이 등을 돌리고 탈영병이 속출하면서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코르닐로프의 반란은 러시아군 지휘부를 축출하겠다며 모스크바로 진격하던 바그너 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행동과 닮았다. 프리고진도 푸틴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반역자로 낙인찍히면서 반란이 실패로 돌아갔다. 프리고진은 모스크바 진격을 선언하면서 우선 우크라이나와의 국경 근처 도시 로스토프나도누를 점령했다. 코르닐로프가 반란에 실패하고 체포됐다가 탈옥해 다시 자신을 따르는 병력을 모은 데가 이 근처인 점도 공교롭다.

푸틴은 레닌의 오류를 바로잡는다는 점을 전쟁 명분으로 내세우면서도 ‘1917년’을 거론한다. 그는 레닌이 소련을 다민족국가 형태로 설계해 분열의 씨앗을 뿌리고 언젠가 터질 시한폭탄을 설치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2016년 연설에서는 레닌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돈바스 지방을 당시 소련의 일부이던 우크라이나공화국에 편입시켰다고 비판했다. 돈바스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지는 지역이다.

아프간전 그림자도 어른거려

1989년 2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는 마지막 소련군 부대가 아무다리야강 다리를 건너 귀국하고 있다.

푸틴은 100년도 더 된 역사를 불러냈지만, 개전 초기부터 우크라이나 전쟁을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비교하는 시각도 나왔다. 우선 이웃 약소국에 자국에 충성하는 정권을 안정적으로 심어놓고 확실한 완충국으로 만들려는 동기가 같다. 당시 소련 수뇌부는 아프간에 이슬람주의 정권이 들어서거나 미군 기지가 설치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러시아가 침공을 결정한 배경에는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입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려는 목적이 있다.

만만하게 봤던 상대한테 곤욕을 치르는 상황도 비슷하다. 1979년 12월 아프간 침공을 감행한 소련 수뇌부는 6개월, 길어야 1년이면 전쟁이 끝날 것으로 봤다. 아프간 수도 카불 등 도시 지역은 손쉽게 소련군 수중에 떨어졌다. 하지만 무자헤딘의 게릴라전에 휘말리면서 전쟁은 10년을 끌었다. 푸틴은 개전 초기에 우크라이나 침공을 전쟁으로 부르지 않고 ‘특별군사작전’으로 명명하며 전면전이 아니라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로 가는 길목에서 막힌 러시아군은 1년5개월째에 접어드는 장기전의 수렁에 빠졌다. 사상자 규모는 벌써 아프간 전쟁의 몇배에 이른다.

미국과 영국 등 서구 국가들이 병력은 직접 투입하지 않으면서도 소련군이나 러시아군의 상대에게 무기를 대주는 상황도 같다. 아프간 전쟁 때도 서구는 소련을 비난하며 제재를 가했다.

아프간 전쟁은 푸틴이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부르는 소련 붕괴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인명 피해와 경제적 손실도 빼놓을 수 없지만, ‘붉은 군대’의 무적의 신화가 깨졌다는 점에 무게를 두는 시각도 많다. 소련이 1950~60년대에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해 한 것처럼 무력을 행사하기 어렵게 됐다는 인식에 동유럽 국가들이 이탈하고 소련 소속 이민족 공화국들의 독립 움직임이 본격화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져 러시아 쪽의 피해가 더 커지고 불만 여론이 분출한다면 이번 침공을 아프간 전쟁에 비유하는 목소리도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마이클 맥폴 전 러시아 주재 미국대사는 “우크라이나는 푸틴의 아프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푸틴이 말하지 않은 것

결국 푸틴이 ‘1917년’을 말한 것은 상당한 위기감의 표현이다. 반란도 충격적이지만, 프리고진이 전쟁의 정당성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도 푸틴한테는 심각한 문제다. 프리고진은 텔레그램에 올린 동영상에서 러시아 국방부가 “우크라이나가 나토와 함께 러시아를 공격할 것이라는 거짓말로 대중과 대통령을 속이려고 했다”고 말했다. 또 잘못된 전쟁 준비와 작전 탓에 많은 러시아인들이 총알받이로 희생됐다고 했다. 푸틴의 후원으로 용병 그룹을 이끌어온 그가 푸틴의 전쟁 명분이 조작됐다고 비난한 것이다.

차르 니콜라이 2세(왼쪽)가 1차대전 전선을 시찰하고 있다.

푸틴의 역사적 비유는 타당한 점도 있지만, 논리적 결함도 있다. 그는 러시아가 내부 분열로 1차대전의 승리를 도둑맞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내분이 본격화한 것은 막대한 인명 피해와 경제적 곤궁 속에서도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불만 폭발 때문이다. 즉 내분은 패배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인 셈이다. 이번에도 쉽게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이 장기화하는 과정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래서 푸틴은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놓았다고 할 수 있다.

푸틴이 스스로 말하지 않은 한 가지는 대제국들 중 정변이 잦았던 러시아 역사의 패턴은 승전 가능성 없는 전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권력이 붕괴된다는 점이다. 로버트 서비스 옥스퍼드대 명예교수는 <포린 폴리시> 기고에서 “러시아인들은 전쟁 상황이 나빠지면 1917년 케렌스키에 대해서처럼 푸틴에 대한 지지를 거둘 것”이라고 했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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