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항의했다고 내쫓겼지만…남아공 미투 ‘로즈대 사건’ 그후

김미향 2023. 7. 4.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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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공간서 저항, 법정투쟁 승리
대학 퇴학처분 취소…젠더이슈 확산”
2017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로즈대학교 교정에서 학생들이 성폭력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트위터 갈무리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사람들은 스스로 인종차별 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무너뜨린 진보적 나라라는 자부심이 있어요. 그래서 높은 인권 의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실제로는 아니었습니다.”

서울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지난달 29일부터 이틀간 열린 한국아프리카학회 학술대회 ‘아프리카의 힘’에 참여한 가바자 마룰레케(39) 남아공 케이프타운대학 교수(정치학)는 최근 디지털 공간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는 아프리카 여성들의 성폭력 저항 운동을 설명하며 한숨을 지었다. 여전히 성폭력에 둔감한 남아공의 사회적 문화 때문이다. “남아공에선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흑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이 만연해왔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처벌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죠.”

이런 흐름을 바꾼 사건이 남아공판 ‘미투 운동’인 로즈대 학생들의 2016~2022년 성폭력 반대 운동이었다. 이 사건이 시작된 것은 2016년 한 학생이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성폭력 피해 경험을 올리면서부터였다. 그러자 다른 학생들도 뒤따라 “나도 당했다(Me, too)”는 고발을 쏟아냈다. 대학 내 인권센터가 있었지만, 피해를 호소해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고통스런 상처를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29일부터 서울 용산구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이틀간 개최된 한국아프리카학회 학술대회 ‘아프리카의 힘’에서 가바자 마룰레케(39) 남아공 케이프타운대학 교수(정치학)가 최근 디지털 공간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는 아프리카 여성들의 성폭력 저항 운동을 소개했다.

학생들의 미투로 순식간에 학내에서 성폭력을 일삼은 재학생과 졸업생 용의자 11명의 명단이 만들어졌다. 학생들은 도서관 벽에 “이들을 데려와라.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쓴 포스터를 붙였다. 또 우르르 기숙사로 몰려가 용의자를 끌어내는 일도 있었다. 이들이 원한 것은 “용의자를 제대로 조사하고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피해자와 이들을 지지하는 학생들이 교내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지만, 학교의 대응은 딴판이었다. 오히려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을 폭행과 명예훼손 등으로 징계하기 시작했다. 로즈대는 2017년 시위를 주도한 다섯 명의 학생들을 제명했고 이 가운데 2명을 영구 퇴학 처분했다.

학교의 대응에 남아공 사회 전체가 놀랐다. 여론은 학생들의 편이었다. 남아공 소셜미디어에선 ‘로즈대와의 전쟁’(#RhodesWar) 해시태그 운동이 번졌다. 학생들을 퇴학시킨 대학을 비판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거셌다. 마룰레케 교수는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학생을 내쫓았기 때문에 사건이 가시화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퇴학 당한 다섯 명 외에도 시위에 참여한 많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성적을 나쁘게 받거나, 시험 기회를 박탈당하는 등 여러 불이익을 당했다. 그 중 한 명은 고통을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다. 영구 퇴학당한 흑인 여학생 욜란다 디얀티는 법정에서 대학을 상대로 수년간 싸움을 계속했다. 결국 남아공 대법원은 2022년 3월 대학에 퇴학 조처를 취소할 것을 명령했다. 무료 법률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결과였다.

디얀티 역시 최종 판결이 나올 때까지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소셜미디어에서 알렸다. 마룰레케 교수는 “디지털 공간에서 목소리를 계속 냈기 때문에 대학이 요구하는 침묵 전술에 저항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개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표출할 장이 있었기에 공론화가 가능했어요. 거대 미디어는 학교와 기득권 사회가 주장하는 것만 보도했지만, 소셜미디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로즈대 투쟁엔 인종과 성별을 떠나 대다수의 대학 구성원이 참여했다. 젊은 여학생들 수십명이 상의를 탈의하고 교정에서 둥글게 모여 서서 노래를 부르거나 구호를 외쳤다. 알몸을 통해 자신들의 분노를 거세게 표현한 것이었다. 남학생들도 함께 상의를 탈의하고 참여했다. 대학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학생 시위대를 지지했다.

투쟁은 전국 곳곳의 다른 대학으로 퍼졌다. 당시 촬영된 영상에서 시위 참가자 한 명은 이렇게 외쳤다. “폭력을 동반한 성차별이 우리 캠퍼스에 만연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안전하지 않다. 특히 흑인 여성들은 일어나야 한다. 우리 중 상당수가 성희롱 희생자이며 성폭력 생존자다.” 마룰레케 교수는 상의 탈의 시위를 한 것에 대해 “아프리카 문화는 본래 여성이 가슴을 드러내는 것을 터부시하지 않는다. ‘여성은 가슴을 가려야 한다’고 말하는 서구의 남성 중심적 사고에 저항하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 투쟁은 영국 식민 지배가 남긴 나쁜 유산을 쓰러뜨리려는 싸움이기도 했다. 남아공에선 영국 시절부터 흑인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광범위하게 발생해왔다. 흑인 여성들은 오랜 기간 침묵을 강요당했지만, 최근에는 디지털 공간에서 목소리를 많이 내고 있다. 마룰레케 교수는 ‘로즈대 투쟁’은 단지 성폭력 반대 운동만이 아니라 영국 식민지 시대부터 소외 받아온 약자들이 기득권에 저항한 시위로 봐야 한다”며 “인종차별 정책을 무너뜨린 진보적인 나라라고 말하면서, 사실상 남아공 사회 곳곳에 여전히 차별이 남아있는 것에 대중들은 크게 분노했다”고 말했다.

로즈대 투쟁은 이후 아프리카 전체로 확대되고 있다. 범아프리카 페미니스트 온라인 플랫폼인 ‘아프리카 페미니즘’(AF)에서 각국의 젠더 이슈에 대해 활발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마룰레케 교수는 “소수자로 살아온 흑인 여성들이 디지털 공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스스로 존중받을 수 있다고 인식하게 됐다”고 말했다.

마룰레케 교수는 자신의 수업시간에 한국의 여성 운동을 다루기도 한다고 전했다. “한국 활동가들의 이야기 들어보니, 사적 영역에서 벌어진 성폭력을 공적 영역으로 끌고 나가려는 노력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는 “로즈대 사건처럼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건뿐만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 여전히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한국도 비슷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꾸준히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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