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첫 올림픽 금메달… 그 바탕엔 국내 챔피언 인정 ‘청룡 메달’ 있었다

부산/채민기 기자 2023. 7. 4.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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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대사 보물] [12]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金 양정모
부산광역시체육회 국제대회기념전시관에서 레슬링 기본 자세를 취한 양정모.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금메달과 참가 기념 주화, 체육훈장 청룡장 제1호 등 그의 기증품을 모은 '레슬링 양정모 선수' 코너가 마련돼 있다. /김동환 기자

“운동복이라도 입으면 모를까 지금 자세가 제대로 나올지….”

지난달 27일 부산 사직동 부산광역시체육회 국제대회기념전시관에서 만난 양정모(70)가 레슬링 기본 자세를 취해 달라는 사진기자의 요청에 재킷을 벗으며 말했다. 멋쩍은 듯 웃었지만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하자 눈빛이 달라졌다. 일흔 나이에도 탄탄한 팔뚝과 떡 벌어진 어깨가 여전했다.

양정모는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자유형 62㎏급)에서 우승해 대한민국의 첫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손기정(1912~2002)이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낸 지 40년 만이었다. 양정모는 ‘대한민국 1호’ 금메달과 훈장 등을 지난해 이곳에 기증했다. 체육훈장 가운데 훈격이 가장 높은 청룡장은 그때 양정모가 받은 것이 제1호다. “고향에 기증하고 싶기도 했고, 나도 생각날 때 언제든 와서 볼 수 있으니까요.” 전시관에 그의 기증품을 모은 코너가 따로 마련돼 있다.

스크린에선 결승 경기 영상이 상영 중이었다. 상대는 몽골의 오이도프. 1974·75년 세계선수권대회 2연패를 이룬 강호였다. 푸른색 경기복의 양정모는 오이도프의 공격에 브리지(두 어깨를 매트에서 떼고 목으로 몸을 지탱하는 자세)로 버티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저땐 사선(死線)에 들었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어찌나 힘을 썼는지 일어나니 머리가 띵했지요.”

당시 결승전은 세 명이 리그전을 벌이고 승패에 따른 벌점을 가장 적게 받는 선수가 우승하는 방식이었다. 양정모는 미국의 진 데이비스를 이미 폴(fall·상대의 양 어깨를 매트에 닿게 하면 KO처럼 경기가 끝남)로 이긴 뒤여서 데이비스에게 진 오이도프에게 판정패하고도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그는 “오이도프와 단판 승부였다면 어찌 됐을지 알 수 없는데 운도 따랐다”면서 “종이 한 장 차이로 결과가 바뀌는 게 스포츠”라고 했다. “시상대에 서니 고통스러웠던 체중 감량이 떠오르더군요. 레슬링을 할 거면 끝까지 하고 그렇게 못 할 거면 시작을 말라고 하셨던 아버지 생각도 났습니다.”

◇국민들에게 자신감 심어준 첫 금메달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가 획득한 대한민국 첫 금메달.

올림픽은 신생국가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는 무대였다.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 직전에 열린 1948년 런던 올림픽(7월 29일~8월 14일)부터 꾸준히 선수단을 파견했다. 역도와 복싱을 시작으로 일부 종목에서 은·동메달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6·25 전쟁 등으로 체계적인 선수 육성을 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세계 정상에 오르는 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때 레슬링 유망주 양정모를 사로잡은 의문이 있었다. “왜 우리는 매번 정상의 문턱에서 돌아서야 하나. 우리는 금메달을 딸 수 없는가?”

양정모가 현역 시절 맞이한 세 차례의 올림픽을 보면 대한민국이 처해 있던 국내외 상황이 드러난다. 동아대 71학번 양정모는 선발전에서 선배들을 꺾고 1972년 뮌헨 올림픽 국가대표가 됐지만 대한체육회의 ‘소수 정예’ 방침 때문에 출전하지 못했다. “체육회 예산이 별로 없던 때여서 메달권에 가까운 선수만 뽑아서 보내기로 했어요. 저는 그때(1971년) 세계 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을 땄는데, 그래도 시니어보다는 약하다고 본 거죠.” 1972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340달러로 2021년 3만4980달러의 100분의 1 수준이었다.

양정모는 “올림픽 나가는 게 꿈이었는데 어린 마음에 실망이 컸고 석 달쯤 (운동을) 쉬었다”고 했다. 절치부심 끝에 그해 12월 이란 테헤란에서 열린 아리아마배(杯) 대회에 출전해 은메달을 땄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한국 사람도 금메달 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계적인 선수들이 경기하는 걸 보면서 가능성을 본 거죠.”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그는 몬트리올 올림픽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몬트리올에서 귀국해 환영 인파에 답례하고 있는 양정모와 정동구 코치.

냉전 시기 올림픽은 동서 양 진영의 이념 대결 현장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 국가들이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대한민국도 불참을 선언했다. 전쟁이 한창이었던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도 선수단을 보낸 대한민국이 1948년 이후 유일하게 불참한 하계 올림픽이다. 양정모는 “선수 생활 막바지였던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메달을 떠나서 내 실력이 어디까지인지를 시험해 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사라져 아쉬웠다”고 했다. 두 번째 올림픽 도전이 무산되자 그는 현역에서 은퇴했다.

양정모의 금메달은 국민들에게 ‘우리도 세계 정상에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몬트리올에서 대한민국은 금메달 1개, 은메달 1개, 동메달 4개 등 총 6개의 메달을 따냈다. 역대 최다였고 종합 순위도 19위로 처음으로 20위 안에 들었다. 조선일보는 ‘올림픽의 개가(凱歌)’라는 사설에서 이렇게 썼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상징을 그대로 빌린다면, 이번 몬트리올 올림픽대회는 이제 우리 국력이 세계 19위라는 것을 선명히 상징한 축전(祝典)이 됐다.”

◇금메달 이전에 ‘청룡 메달’이 있었다

한국 레슬링의 첫 메달이었던 장창선의 1964년 도쿄올림픽 은메달을 기념해 조선일보와 대한아마튜어레슬링협회가 주최한 '청룡메달쟁패전' 메달. 양정모는 건국상고 3학년이었던 1970년에 이 메달을 땄다. /김동환 기자

부산 출신인 양정모는 중학교 시절 레슬링에 입문했다. 친구들과 용두산 공원에 갔다가 근처에 있던 한일체육관에 구경 간 일이 레슬링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때까진 프로레슬링만 알았어요. 그런데 레슬링은 프로레슬링하고는 다르고 잘하면 올림픽 메달을 따서 국위를 선양하고 대학교도 갈 수 있다고 하더군요.” 체구가 크지 않았던 그에게는 체급 경기라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함께 시작한 친구가 힘들다고 그만둔 뒤에도 양정모는 레슬링을 계속했다. 그때 어린 양정모가 꿈꿨던 것 중 하나가 ‘청룡 메달’이었다. 장창선의 1964년 도쿄올림픽 레슬링 은메달을 기념해 조선일보와 대한아마튜어레슬링협회가 함께 개최한 청룡메달쟁패전 우승을 뜻한다. “선배들이 메달을 보여주는데 화려한 청룡이 새겨진 게 너무나 멋져 보였어요. 매년 12월에 열린 선수권대회였으니 그 메달을 받는다는 건 한국 챔피언이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양정모는 건국상고 3학년 때인 1970년 제7회 대회에서 이 메달을 받았다.

레슬링은 유도·양궁에 이어 대한민국이 하계 올림픽에서 세 번째로 많은 메달을 획득한 종목이다. 그러나 최근엔 하락세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는 한 개의 메달도 나오지 않았다. 양정모는 “어린 선수들이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인기 종목으로 몰리다보니 레슬링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며 아쉬워했다. “일본 여자 레슬링은 어린이들을 놀이처럼 훈련시키는 방식으로 선수층을 넓혀 세계 최강으로 도약했습니다. 우리 선수들도 기왕 레슬링을 시작했다면 즐기는 마음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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