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칼럼] 피렌체를 지배한 메디치 가문의 문장
르네상스 이탈리아 피렌체를 지배한 메디치 가문은 수 대에 걸쳐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세기적인 천재 예술가를 후원한 걸로 유명하다. 이 시기 회화 조각 건축에서 과감하고 혁신적인 시도가 일어나 중세에서 벗어나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관이 자라났다.
이 가문은 조반니, 코시모, 피에로, 로렌초 메디치가 활약한 15세기에 급부상했다. 이후 네 명의 교황과 두 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해 유럽 최고의 명문가에 올라섰다. 재능있는 예술가를 지원하고 희귀문서를 수집해 메디치 도서관을 세우는 등 학문 발전에 엄청난 투자를 한 건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가문의 세속적인 이미지를 쇄신하고 미화하기 위해서다.
유서 깊은 메디치 가문은 어떻게 시작했을까? 메디치(Medici)라는 이름은 메디신(Medicine·약) 에서 나왔다. 이 말은 당대 이탈리아어로 의사 혹은 약사라는 뜻이 있어 의사·약사 길드에서 시작했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시민이 주축이 된 공화국 피렌체에서는 정치력을 갖거나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도시 내 21개 길드(guild) 중 하나에 반드시 속해야 했다. 피렌체 주력 산업에 종사하는 모직 상인, 실크 상인, 모피 상인, 옷감 염색업자 그리고 전문 직종 은행가, 판사·변호사, 의사·약사 7개 길드의 영향력이 강했다.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의 구(ball)를 알약으로 해석해 의료업에서 시작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메디치가 의사·약사 길드에서 시작했다는 주장은 확실하지 않다. 13세기 후반 메디치 가문은 환전상을 했다. 은행업의 초기 형태 환전상은 시장에서 작은 탁자를 펴놓고 오가는 시민을 상대로 돈을 바꿔주는 일이다. 14세기 중반 메디치 환전상이 기본 회비 5플로린(피렌체 금화)을 은행가 길드에 낸 기록이 있다. 당시 명문 은행가 페루치 가문이 18플로린을 낼 때다.
소규모 환전상에 불과한 메디치가가 두각을 나타낸 건 조반니 때부터다. 1406년 피렌체가 피사를 침공해 지중해 항구를 차지하자 두 도시를 잇는 아르노강을 따라 무역로가 개척되었다. 피렌체 상인은 영국 네덜란드에서 양모를 수입해 옷을 만들어 염색한 후 판매했다. 시류의 변화를 포착한 조반니는 재빨리 두 개의 모직공장을 인수하고 모직 길드에도 가입했다. 은행과 모직공장을 거느린 메디치 기업이 탄생한 것이다.
매사에 신중하고 정치 감각이 뛰어난 조반니는 교황 요한 23세와 결탁해 교황청의 재정을 관리하는 특권을 따냈다. 피렌체에 본점을 둔 메디치 은행의 로마 지점이 교황의 금고를 관리했다. 그를 이어 아들 코시모 때는 파리 런던 브뤼헤 등 유럽 16개 도시에 설립한 은행을 통해 유럽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메디치가의 문장에서 구의 수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초기에는 11개였다가 9개 8개 7개 마지막에는 6개로 변했다. 구의 수를 보면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조반니 때는 8개, 코시모 때는 7개다. 병약해 어릴 적부터 통풍에 걸려 고생한 피에로 때에 문장의 큰 변화가 일어난다. 피에로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프랑스 왕 루이 11세가 왕가를 상징하는 백합 문양을 메디치가 문장의 구 중 하나에 사용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이때부터 메디치가 문장은 프랑스 백합 문양이 찍힌 하나의 푸른 구를 갖게 되었다. 프랑스 문장은 잎사귀만 달린 백합이고 메디치가 문장은 잎사귀와 꽃이 함께 달린 백합이다. 인문주의 혁명 르네상스를 절정에 올려 ‘위대한 자’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얻은 로렌초 때는 구의 수가 6개가 되었다.
문장의 구가 알약을 뜻하는지 또 다른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350년간 지속된 명문가의 후원과 기부 덕분에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은 약동하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다. 보기만 해도 절로 감탄이 나는 위대한 예술품과 작가를 배출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를 거대한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만들어 현재까지도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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