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장마 뒤 꽃 피우는 선비의 나무
장맛비 지나고 삼복더위 다가오면 우윳빛으로 피어나는 꽃이 있다. 회화나무 꽃이다. 조선시대 학동들은 이 꽃을 보며 과거 시험 채비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또 나무의 생김새가 선비의 기품을 닮았다고 해서 옛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아예 ‘선비수’ ‘학자목’이라고 불렀다. 풍성하고 품위 있는 생김새를 자랑하는 나무이건만 우리나라의 회화나무 중에서 유난히 빈약한 몸으로 서 있는 회화나무가 있다. 충남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다.
이 나무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불편한 생김새를 갖게 된 건 1866년, 조선의 조정에서 천주교 탄압 교령을 발표하고 8000명에 이르는 천주교 신자를 처형한 병인박해 때부터다. 그때 해미읍성에서 처형당한 백성은 1000명을 넘었다. 읍성의 관리들은 천주교 신도들을 나무가 서 있는 감옥 앞 공터로 불러내 배교를 강요했고, 선선히 배교를 허락하지 않은 신도들은 머리채가 묶여 나무에 매달렸다.
350년쯤 된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는 높이 14m, 줄기 둘레는 3.5m쯤 되는 큰 나무인데, 풍성하게 펼쳐야 할 나뭇가지가 무척 성글다. 이 때문에 여느 회화나무와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선비수’라 부르기에 맞춤하지 않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비의 기품처럼 풍성했을 나뭇가지는 읍성의 관리들이 교수대로 쓰기 위해 베어냈을 수도 있고, 심한 매질을 당하며 죽음에 든 사람의 고통을 바라보며 나무가 스스로 떨궈냈을 수도 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참혹한 아우성을 바라보아야 했던 건 순전히 나무가 자리 잡은 곳에 사람들이 감옥을 지었다는 것 외에 다른 요인은 없다. 나무는 말 한마디 못한 채 죽음의 현장을 지켜본 아픔을 긴 세월 동안 보듬고 모질게 살아왔다.
사람들은 슬픈 운명으로 살아온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를 ‘교수목(絞首木)’이라고 부른다. 서서히 잊혀가는 옛사람들의 비명을 간직한 채 이 여름에도 얼마 남지 않은 교수목의 가지 끝에서는 우윳빛 꽃이 환하게 피어날 것이다.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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