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33] 재현이 실패한다면 과학인가
1996년 뉴욕대학교의 심리학자 존 바그(John Bargh)는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서 단어들을 준 뒤에 이를 엮어서 문장을 만들어보라고 했다. 이 중 한 그룹이 받은 단어는 노인을 연상시키는 빙고, 회색 같은 단어였다. 실험이 끝나고 이들이 방을 나가서 복도 끝까지 걷는 시간을 쟀는데, 노인을 연상하는 단어를 받은 그룹이 더 천천히 걷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무의식적인 노인 생각이 노인 같은 행동을 유발한다는 것을 보인 이 실험은 심리학 교과서에 실렸으며, 바그의 논문은 5000회 이상 인용되었다.
2011년에 몇몇 심리학자는 바그의 실험이 재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같은 실험을 했지만, 걸음걸이가 느려지는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심리학 분야의 실험 중에서 39%만이 재현 가능하다는 결과가 발표됐다. 암젠(Amgen)사의 연구원들은 학계에서 출간한 암 연구 논문 53편 중 6편(11%)만 재현 가능했다고 발표했다. 심리학, 생물학 분야에서 드러난 재현 문제를 일회성 오류가 아닌 ‘재현성 위기(replicability crisis)’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칼 포퍼 같은 과학철학자는 실험 결과 재현이 과학의 주춧돌이라고 강조했다. 갈릴레오의 자유 낙하 실험은 누가 해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런데 이제 수많은 연구가 재현되지 않고 있다. 비판자들은 과학에 상업적 이해관계와 미디어가 침투하면서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의 가치가 훼손되었고, 질 낮은 논문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재현되지 않는 논문 중에는 ‘네이처’ ‘사이언스’처럼 유명한 학술지에 출판된 논문도 많았다.
최근에는 재현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교과서 실험이나 컴퓨터 코딩은 표준화가 잘 되어 있어서 누가 해도 같은 결과가 나오지만,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나 암 연구처럼 연구자도 잘 모르는 새로운 현상을 탐구하는 실험은 표준화가 충분히 돼 있지 않아서 재현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재현의 실패가 과학에 대한 신뢰의 추락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어쩌면 재현이 과학의 본질적 속성에서 빠질 때가 되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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