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한국 산재사, 일본 과로사, 미국 절망사

기자 2023. 7. 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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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23일, 27세의 노동자가 홀로 엘리베이터 수리 작업을 진행하다 20m 아래 바닥으로 추락해 사망했다. 그는 “혼자선 작업이 힘들어서 못하겠어요. 도와주세요”라며 동료에게 전화한 이후 14분 뒤 추락했다고 전해진다. 노동건강연대에 따르면, 매년 7명가량의 노동자가 엘리베이터 작업 도중 사망했다고 전해지며, 올해는 6월까지 27세 노동자를 포함해 벌써 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4명의 사망원인은 끼임, 떨어진 물체에 외상, 추락, 또다시 추락이었다. 원인으로 지목된 것은 막대한 업무량, 절대적으로 부족한 기한, 그리고 노동조합의 주장에 응답하지 않은 기업이었다.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죽은 이의 동료는 익명 게시판에 ‘예견된 인재이고 분명 경영진이 막을 수 있었던 사고’였음을 강조했다. 해당 사건은 중대재해처벌법 대상 사건으로 조사가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그 결과 또한 기다려 봐야 하며 그 기간 동안 누군가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정말 앞으로 남은 3명이 채워질까 벌써부터 두렵기만 하다.

<2146,529>라는 숫자가 제목인 책이 있다. 숫자의 의미는 부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노동자의 죽음’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2002년 “산재사망은 기업의 살인이다”를 슬로건으로 출범한 노동건강연대는 2022년 1월에 2021년 산재사망자 수의 추정치 ‘2146’, 그중 사고사 및 과로사 수 ‘529’를 제목으로 새긴 책을 발간했다. 책은 그해 발생한 산재사망 기사를 날짜별로 정리해 놓았다. 이 칼럼이 게재되는 2년 전 같은 날짜에도 추락사로 3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책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작은 파편과도 같은 산재사망 기사들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사망 당시의 현장과 업무는 달랐지만 모두 끼이고, 부딪치고, 추락해 사망에 이르렀다. 책은 이 처참한 장면들이 한국 사회에서 20년간 변함없이 ‘1년에 2100명, 하루 5~6명’ 발생하고 있음을 기억해주길 소망한다. 2021년 1월26일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되고, 2022년 1월27일 법이 시행되었지만, 여전히 이 죽음의 레이스는 멈춰지지 않고 있다.

한국의 산재사고의 치명률(노동자 10만명당 치명적 산업재해 수)이 가장 높았던 시기는 1994년으로 34.1명에 달했다(통계청 자료). 이후로 감소추세에 있지만,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5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시기 옆 나라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든 문제는 1980년대부터 등장한 ‘과로사’였다. 그중에서도 1990년대 들어 ‘과로 자살’이 가장 큰 문제로 급부상했다. 일본의 우울증과 과로 자살 문제를 20년간 추적한 의료인류학자 기타나카 준코 교수는 그 원인으로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는 수준의 과도한 업무량, 일본문화 특유의 집단을 위한 희생 강요, 그리고 이를 홀로 감당해내야 하는 막다른 현실을 꼽았다. 이로 인해 이른바 ‘국민병’이 돼버린 우울증(일명 ‘과로 우울증’)이 노동자 사이에서 확산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자살을 선택한 노동자가 증가했다고 보았다. 1990년대 경기침체 시기 약 12년 동안 매년 3만명이 넘는 자살 수치와 2.4배가량 증가한 우울증 환자 수치가 이를 잘 대변해준다.

필자의 외국인 친구들은 한국의 높은 산재 사망률에 관해 이야기하면 믿지 못하는 표정을 짓는다. 기타나카 교수 역시 미국의 동료들에게 일본에서 과로로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하는 노동자가 많다고 이야기했을 때 그들 역시 믿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 미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미국 경제학자 앵거스 디턴 교수(2015년 빈곤연구로 노벨 경제학상 수상)는 2020년 아내 앤 케이스 교수와 함께 출간한 책에서 미국사회의 ‘절망사(deaths of despair)’를 지적한다. 이들이 주목한 절망사의 원인은 ‘자살, 약물 과다복용, 알코올성 간 질환’이다. 즉, 경제적·사회적·심리적 절망으로 인해 좀 더 빠르고 혹은 느린 방법을 통해 미국인이 사망에 이르고 있다고 본다.

생각해보면, 얼핏 달라 보이는 한국의 산재사와 일본의 과로사, 미국의 절망사는 어딘가 비슷해 보인다. 그것은 희망찬 미래보다 ‘막막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혁신으로 장밋빛 미래를 예찬하지만, 이 세 종류의 죽음이야말로 지금 인류가 마주한 미래이지 않을까. 디턴과 케이스 교수가 예견한 ‘자본주의의 미래’에도 아직 희망보다 절망이 가득해 보인다.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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