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고에서 찾아낸 유물이야기] <61> 동래 관왕묘의 관제영첨(關帝靈籤)

유현 부산박물관 전시운영팀장 2023. 7. 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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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박물관 민속실 수장고에는 외롭게 자리를 지키며 아직 관람객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그 이름도 생소한 '관제영첨'이라는 유물이 있다.

결국 '관제영첨'이란 관왕묘(관우를 모신 사당)에서 신령스러운 점괘를 뽑아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을 쳐서 알아보는 도구이다.

이 생소한 관제영첨이 왜 부산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것일까? 사실 19세기 후반 동래에도 관우 신앙이 확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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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유입된 ‘관우 숭배’ 흔적 … 대한제국 때까지 유행

부산박물관 민속실 수장고에는 외롭게 자리를 지키며 아직 관람객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그 이름도 생소한 ‘관제영첨’이라는 유물이 있다. 관제(關帝)는 관왕, 관황, 관성제군으로 불리며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충의(忠義)의 장수 관우(關羽)를 말한다. ‘영첨(靈籤)’은 신령스러운 점괘를 뽑는다는 의미이며 얇은 대나무에 1첨부터 100첨까지 100개 점괘를 새겨 큰 대통에 섞어 놓은 것이다.

관우를 모시는 사당에서 점을 칠 때 사용한 ‘관제영첨’. 부산박물관 제공


결국 ‘관제영첨’이란 관왕묘(관우를 모신 사당)에서 신령스러운 점괘를 뽑아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을 쳐서 알아보는 도구이다. 다만 점쟁이들이 쓰는 ‘산통’에는 주역의 64괘가 들어있고, 유생들이 경전을 암기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서 통은 유교 경전이 쓰여있다는 점에서 영첨과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우를 모시는 신앙은 언제 생겨났을까?

관우 신앙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장수를 통해 전래되었는데, 이들은 전국 각지에 사당을 세우고 왜군과 맞붙는 전쟁에 출정하기에 앞서 승리를 기원하는 의식을 올렸다. 이후 조선 국왕들은 관우가 상징하는 ‘충의’라는 이미지를 왕권 강화 수단으로 삼아 관왕묘 의례를 국가 차원에서 유지·관리하며 국가와 지배자의 권위를 높이는 데 이용했다.

19세기 후반부터 고종과 민비, 엄비는 관우 신앙을 정치뿐만 아니라 민간 영역까지 확산시켰다. 이른바 무속과의 결합 양상을 보인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관우를 빙자한 무속 행위를 엄히 단속하기 위해 민간에서 받드는 관우상을 경무사가 압수하였는데(1904년) 한양에만 무려 3000본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는 관우 신앙을 미신으로 탄압하여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지금은 서울 동묘, 안동 관왕묘, 전주 관왕묘, 남원 관왕묘, 고금도 관왕묘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이 생소한 관제영첨이 왜 부산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것일까? 사실 19세기 후반 동래에도 관우 신앙이 확산하였다. 이에 동래부사는 관우 숭배가 공적 성격을 가지므로 민가에서 받드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면서 동래읍성 서문 밖(동래구 명륜로 109)에 관왕묘를 건립하고 제사 재원도 마련하여 봄가을에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이후에는 기영회와 양로당에서 제사를 유지·관리했다.

관왕묘에서 영첨으로 점을 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관우에게 치성을 올리며 산통을 계속 흔들어 그중 가장 먼저 떨어지는 대나무를 점괘로 삼는 것이며, 두 번째는 치성을 드린 후 자기 손으로 점괘를 뽑는 방법이다. 다만 각 첨은 중국 고사성어나 역사 인물과 관련된 요약문이 적혀있으므로 어느 방법을 사용하든 별도로 비치된 책자의 설명을 보아야 한다. 요즘같이 혼란한 세상, 영첨 통을 흔들어 관우에게 길을 물어보고픈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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