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역사에 헌신한, ‘부끄러움’을 아는 어른 강만길

한겨레21 2023. 7. 3.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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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현재성’과 ‘대중성’이 선순환을 이루며 역사학을 한 단계 고양하기 소망했던 역사학자 강만길
2023년 6월23일 별세한 역사학자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2018년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역사학자 강만길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90. 한국 역사학계 거인이라 불린 그의 죽음에 대중의 반응은 자못 차분하고 담담했다. 아니, 차라리 ‘무반응’이었다고 쓰는 게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당연하다. 강만길을 세상에 알린 ‘분단시대’라는 화두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 대표되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삶도, 정체성론 극복을 위해 제시한 ‘자본주의 맹아론’도 이제는 너무 낡게 느껴질 테니.

역사학자 강만길이 역사화하지 못한 ‘이야기’

그러나 강만길을 꾸미는 말들이 낡았다고 해서 그가 낡았다는, 혹은 잊혀 마땅할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오랜 수사를 걷어내면, 격동의 20세기를 살아간 역사가 강만길이 눈에 들어온다. 강만길의 회고록 <역사가의 시간>을 펼쳐든 건 그래서다. 강만길을 대표하는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이나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과 달리, 이 책은 ‘논저’라기보다 ‘사료’에 가깝다. 각 장의 제목이 ‘~한 이야기’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강만길 본인도 ‘역사화’하지 못한 경험과 일화가 잔뜩 담겨 있다. 얼치기 역사학도로서, 부족하게나마 역사적 접근으로 감히 ‘강만길의 시간’에 다가서고 싶었다.

강만길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기탄없이 풀어놓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요소는, 다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운’이다. 스스로도 여러 번 이야기했듯 강만길은 꽤나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지만 소학교(국민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6년제 중학교 5학년 시절 한국전쟁을 맞았으나 고향인 마산은 대구·부산과 더불어 북한군에 점령되지 않은 몇 안 되는 대도시였다. 별수 없이 학도의용대원이 된 뒤에도 징집 연령에 1년 이상 미달했기에 강제 징집되지 않았고, 부산에서 전쟁물자 하역노동자, 포탄 운반노동자, 미군부대 체커로 일했다. 성인이 될 즈음 전란을 피해 서울의 주요 대학이 영남에 내려와 있었고, 담임선생의 배려로 대구에 있던 고려대 사학과에 지원해 합격했다.

대학생이 된 뒤에도 강만길의 ‘운’은 계속됐다. 지도교수 신석호는 강만길을 매우 아꼈고, 그가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일하게끔 주선했다. 강만길이 서른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고려대 사학과 최초의 모교 출신 전임교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스승의 강력한 추천 덕분이었다. 심지어 군대 역시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고등학교 동기생의 집에서 하숙하던 종씨 ‘강중령’의 도움으로 의병제대했다.

자부심이나 분노가 아닌 부끄러움

물론 강만길 역시 유신독재 시절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 취조실로 불려가고, 신군부 등장과 함께 성북경찰서 유치장에서 한 달을 산 뒤 끝내 해직교수가 되는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그가 당한 고문이라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한 강의가 빌미가 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때, 구치소에서 불려나가 검사를 만나기 전 좁은 공간에 온종일 대기하게 하는 ‘비둘기통’ 형이 최대였다. 해직교수 시절에도 아내가 남의 집 도우미로 일하고 막내아이가 엇나가는 아픔이 있었다지만, 창비사의 도움으로 <한국근대사>와 <한국현대사>를 쓰며 매달 일정한 생활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같은 시기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수많은 사람과 비교하면 분명 복 받은 삶이었다.

강만길은 스스로가 운 좋은 사람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자기 삶에 찾아온 여러 행운을 무척이나 담담한 어조로, 남김없이 털어놓는다. 오히려 강만길의 글에서 느껴지는 주된 정서는 자부심이나 분노가 아닌, 부끄러움이다. 일제가 패망하고 하루가 지나서야 평생 처음 보는 ‘급조’ 태극기를 흔들며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을 맞이한 동네의 모습, 이승만과 김구의 소식이 아스라이 들려올 뿐 누구 하나 올바른 정치노선을 제시하지 못한 ‘해방공간’의 혼란, 좌익 사건에 휘말려 학교에서 쫓겨나 감옥살이하고 기름장사를 하며 살던 젊은 교사, 미군의 폭격을 맞고 개울에 줄지어 누워 있던 인민군 소년병들의 주검, 성북경찰서 유치장에 조용히 울려퍼지던 대학생들의 합창까지. 강만길은 삶의 모든 경험을 부끄러움으로 간직했다.

이 깊고 깊은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단이, 강만길에게는 역사였다. 그는 1981년 창비가 주최한 좌담회 ‘1980년대를 맞이하며’에서 나눈 서남동 목사와의 대화를 비중 있게 소개한다. 지금의 신이 신으로 여겨지지 않을 때쯤이면 역사를 움직이는 법칙이 곧 그때의 신이 될 수 있으리라는 서 목사의 이야기에 “세상에 이렇게 생각하는 목사요 신학자가 있다니” 하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그에게 역사는 곧 신이었다.

실제 역사를 대하는 강만길의 자세는 유교의 사대부(士大夫)나 지사(志士)보다는 기독교의 목회자와 훨씬 닮아 있다. 그는 라틴어로 쓰인 성경을 대중의 입말인 독일어로 옮긴 마르틴 루터와 같이, 상아탑에 갇혀 현실과 유리된 역사학의 ‘종교개혁’을 도모했다. 전공을 조선시대사에서 과감하게 근현대사로 옮기고 대중을 위한 계간지 <내일을 여는 역사>를 펴내는 등, ‘현재성’과 ‘대중성’이 선순환을 이루며 역사학을 한 단계 고양하기 소망했다. 이로 인해 스스로가 논문을 쓰는 학자보다는 칼럼을 쓰는 논객이 됐다며 자조도 여러 번 늘어놓았지만, 자신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후보로 추천하지 말도록 조처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본인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스피노자의 시대를 역사화하는 방법은

그런 강만길이 세상을 떠난 지금, 역사학은 그의 시대와는 적잖이 달라졌다. 강만길은 스승 신석호의 뒤를 이어 ‘한국근대사’ 강의를 처음 맡았을 때 세종대왕에 멈춰 있던 범위를 조선 후기까지 끌어올렸다며 자랑스레 회고했지만, 요새 젊은 연구자들은 1980·1990년대까지도 ‘역사학’ 영역에 포함한다. 강만길이 자본주의와 상업, 민족과 민주, 평화와 통일 등 굵직한 주제에 천착했다면 이제는 개인의 감정 같은 내밀한 영역은 물론 아예 인간의 범주를 넘어 동물과 사물을 아우르는 연구가 이뤄진다. 만일 아직도 역사학에 신이 있다면, 그 모습은 루터가 두려워한 전능한 절대자가 아니라 스피노자의 말마따나 만물에 깃든 무심한 자연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학의 종교개혁을 꿈꾼 루터 강만길을 지금 같은 스피노자의 시대에 어떻게 ‘역사화’할지, 그의 명복을 빌며 고민해본다.

유찬근 대학원생

*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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