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아는 사람들에게 [책방지기의 서가]

2023. 7. 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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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목 지음, '슬픔을 아는 사람'
편집자주
'문송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건 인문학적 교양입니다. '문송'의 세계에서 인문학의 보루로 남은 동네책방 주인들이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슬픔을 아는 사람'은 시인이자 영화인 유진목의 책이다. 유진목은 2022년 여름, 베트남 하노이에 다녀왔다. 그 여행을 글과 사진으로 모아 '유진목의 작은 여행'을 펴냈다.

사람들은 슬픔이라 하면 부정적인 감정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언젠가부터 슬픔을 말하는 글을 읽을 때, 사랑으로 바꾸어 읽는 습관이 생겼다. 한 사람이 가진 슬픔이라는 덩어리에서 슬픔에 기대어 타인의 마음을 안아주는 사랑의 힘이 있다는 것을 이 책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죽음 가까이에 서 있는 사람의 글이었지만 유진목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매일 죽음을 생각하는 유진목은 죽기 위해 연습을 하는 사람 같아 보였다. 죽음에 대한 간접 경험은 결국 잠이 아니었을까. 먹지 않고 쉼 없이 자는 것에만 의존했다. 결국, 삶과 죽음에 자유로워지기 위해 수없이 연습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신도 모르게 삶과 죽음에 대해 애착하지 않고 끌어안고 있었다. 잠 역시 삶에 속해 있는 것이기에 노력인 줄 모른 채 그녀는 노력하고 있었다. 신형철 작가의 말씀을 빌리자면 유진목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아는 사람이었다.

비정상적 슬픔은 우울, 정상적 슬픔은 애도라 하지만 유진목 작가의 '슬픔을 아는 사람'은 한평생 같은 이야기를 자기만의 속도로 자신에게 충분히 위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슬픔을 아는 사람'이 아닌 '사랑을 아는 사람'으로 읽는다.

유진목은 불행할 때 보았던 모든 것을 행복함으로 다시 보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먹고 싶은 것을 먹기 위해 하노이로 떠났지만 잘 먹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하루의 삶을 살기 위해 떠난 사람 같아 보였다. 죽음으로 끌려가는 사람에게 희망을 걸 데가 없지만 먹기 위해 움직이고자 하는 단 1%의 행(行)이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주는 슬픔은 그냥 그 자체로 유진목 작가의 존재함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불행 중의 행(幸)을 남긴 여행이 있었기에 영화를 만들고, 글 쓰는 사람일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슬프게 운다고 해서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는 유진목 작가의 글에서 다시 한번 그의 사랑을 확인한다. 슬픔을 아는 사람이 아닌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저 슬퍼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운 유진목은 이미 자유로운 삶 그 자체로 빛나고 있었다. 솔직히 유진목은 그런 자신의 매력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솔직하게 쓴 글에서 드러나는 매력은 숨길 수 없는 법이니까. 아프고 슬퍼해 본 사람은 알아본다. 지금도 밖에서는 웃고, 안에서는 울고 있을 유진목을 말없이 안아주고 싶어졌다. 누군가의 슬픔을 노래하는 글에서 우리는 모두 자신의 슬픔을 모아 볼 것이다. 모은 눈물은 자연스럽게 증발해버리는 순간, 슬픔을 미워하지 않고, 죽음을 밀어내지 않으면서 그저 느슨함으로 또 다른 누군가를 꼭 안아주는 힘이 생긴다. 나를, 너를, 우리를,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슬픔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지만 자신을 향해 솔직하게 쓴 글은 늘 한계치를 넘어선다. 슬픔을 공감할 줄 아는 사람 덕분에 슬픔을 공부한다. 유진목은 어쩌면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해, 글이 쓰고 싶어서 하노이에 분짜를 먹으러 간 것이 아니었을까. 분짜를 글자로 바꿔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하노이 덕분에 사랑을 아는 사람을 만났으니 하노이는 유진목이다.

책 속에서 유진목의 한마디가 눈길을 끈다. '내가 쓰는 글은 어떤 글일까? 가끔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을 꼭 전해주고 싶다. 슬픔에서 쾌활한 광기를 드러내는 사람이라면 그 광기는 사랑을 아는 사람이므로 당신의 글은 아름다웠다. 슬픔으로 훼손한 삶이 아니라 슬픔이 있었기에 영혼의 힘이 살아 움직였다. 그래서 그녀의 글은 사랑이다. 슬픔이 있어 때론 살아가는 힘이 된다. 하노이가 유진목 작가라면 지금은 김미연이다. 슬픔을 아는 사람도, 사랑을 아는 사람도 모두 삶을 여는 사람이다. 슬픔 때문에 흘린 눈물은 슬픔 덕분에 살아간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지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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