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오늘날 미·중 패권대결 구도의 출발점이다[정전 70년 한반도 영구 평화를 향해]

기자 2023. 7. 3.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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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세계 : 세계전쟁 시대의 한반도 문제
한국전쟁은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 사이의 국익 극대화를 위한 치밀한 길항의 산물이었다. 특히 스탈린의 방혈(放血)전략과 김일성의 무력통일전략의 만남이 결정적이었다. 사진은 김일성이 1949년 혹은 1950년, 스탈린과 김일성,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린 만찬장에서 연설하고 있는 모습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전쟁은 2차대전 종전 과정의 미·소 합의에 기반한 분할선을 공산진영의 국가들이 연합하여 무력으로 제거하려 한 시도였다. 따라서 이 전쟁의 발발에 대한 해석들은 그동안 이념을 기준으로 접근해왔다. 한국전쟁은 (미·소) ‘냉전’ 대결의 폭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류다. 2차대전 이후 강대국 관계, 특히 미국과 소련, 미국과 중국, 그리고 소련과 중국 관계를 이념을 기준으로 해석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한국전쟁의 기저가 미·소 냉전구도였다면, 조선-소련-중국 관계는 직접 요인이었으며, 미·중 접근의 실패는 배경이었다. 즉 미·소 냉전 대결보다는 조·소·중 각각의 국익 추구와 길항이 한국전쟁 발발의 원인이었다.

조·소·중 관계에서 이념은 겉치레일 뿐이었다. 그들 관계의 중심 기준은 국익이었다. 그들은 국익을 기준으로 심하게 길항하고 갈등하였다. 국제공산주의? 그런 입에 발린 말은 실제 정책에서는 주요 요소로 작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말뿐이었다. 외려 소련은 중국공산당을 오랫동안 공산주의자들이라기보다는 민족주의자들로 의심하였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이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티토와 같은 길을 가지 않을까 의심하였다. 국제주의는 허울이었다.

한국전쟁 시기와 한국전쟁 이후처럼 한국전쟁 이전도 마찬가지였다. 마오쩌둥은 자신과 중국공산당에 대한 스탈린으로부터의 긴 모욕과 멸시를 뼛속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항일 전쟁 시기 중요한 순간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라 국민당 쪽을 지지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중국혁명과 대륙 통일에 대한 스탈린의 반대는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는 마오의 군대가 국부군을 궤멸시키고 중국을 통일하는 것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당시 스탈린과 소련은 마오쩌둥보다는 장제스 편이었고, 공산통일이 임박하자 대륙분할을 제안하였다. 미국과 소련은 국부-공산 사이의 중국분할에 관한 한 의견이 다르지 않았다. 훗날 중국의 짧은 친소 편향은 이러한 길항과 견제를 선제적으로 돌파하려는 역설적 산물이었다.

소련이 제공한 특별기를 타고 1950년 3월30일부터 4월5일까지 두 번째로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이 스탈린과 만나고 있다. 스탈린은 1950년 4월10일 남침 전쟁을 승인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전쟁은 미·소 간 ‘냉전’ 대결의 폭발이라는 관점은 오류다
미·소 냉전 대결보다는 조·중·소 각각의 국익 추구와 길항이 전쟁 발발의 원인이었다

스탈린, 방혈전략 실험기회로 활용

조선-소련-중국 사이의 합의에 기반한 한국전쟁 결정과 도래 역시,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 사이의 국익 극대화를 위한 치밀한 길항의 산물이었다. 특히 스탈린의 방혈(放血)전략과 김일성의 무력통일전략의 만남이 결정적이었다(후자는 후술한다). 방혈전략은 타국의 최대한의 유혈과 희생을 통해 자국의 안전과 이익을 극대화하는 접근을 말한다. 또는 최소 피해를 통해 최대 전과를 얻는 전략을 말한다. 근대 전쟁에서 방혈전략의 초기 천재는 나폴레옹이었다. 그러나 국제전략에서 이를 활용한 대표적 지도자들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루스벨트, 해리 트루먼,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러일 전쟁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어느 일방을 편드는 대신 러시아와 일본이 모두 철저히 파괴될 때까지 싸워서 둘 모두 패권을 갖지 못하게 될 때 평화가 도래할 것으로 봤다. 전형적인 방혈전략이었다. 2차대전 당시 처칠·프랭클린 루스벨트·트루먼과 스탈린은 각각 히틀러를 사이에 두고 서로 상대와 히틀러가 끝장을 보는 유혈을 통해 모두 절멸 수준까지 피해를 보기를 희망하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주의였다. 방혈전략은 같은 연합국이면서도 그들 쌍방이, 히틀러가 서방과 소련을 각각 침공할 때, 상대를 돕기 위한 제2전선의 개창 문제를 최대한 늦춘 근원이었다. 소련은 히틀러의 프랑스 공격 성공에 대해 조기에 동부전선을 개창하여 저지하기는커녕 외려 ‘최대의 축하’를 표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독일이 방향을 틀어 이제 독소 전쟁이 최악으로 치닫자 이번에는 서방이 제2전선 개창을 가능한 한 늦추어 소련은 최대의 피해를 보고 말았다.

전후 스탈린은 폐허에 직면한 소련의 재건과 안전, 세계공산권 통제, 서방 견제를 위한 계기가 절실했다. 특히 미국과 중국을 한꺼번에 방혈 기회로 묶을 수만 있다면 단연 최고였다. 소련으로서 그것은 자본주의진영의 최강대국 미국과 공산진영 내부의 버거운 상대인 중국을 한꺼번에 대형 유혈전쟁에 묶어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김일성의 조급한 무력통일 추구는 스탈린으로서는 방혈전략을 위한 최대 밑밥이었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의 비밀 결정과정에 중국을 끌어들이고, 한국전쟁은 동의하면서도 중국통일은 반대하며, 무엇보다도 미국의 참전을 허용하기 위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고의로 불참하여 미군 참전을 허용하며, 나아가 미군 참전 이후 전세 역전에 직면해서는 중국군 참전을 계속 종용하여 관철시키고, 미·중 대결의 성사 이후에는 조기 종전을 반대하여 전쟁을 장기화시킴으로써, 한국전쟁을 가장 이상적인 방혈전략의 실험 기회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반도에 미국과 중국이 모두 묶여 있는 동안 소련의 안보는 전혀 위협받지 않았다. 미·소 충돌 위험 역시 사라진 동시에 동구에 대한 장악력은 최대로 높일 수 있었다. 또한 중국과 서구의 대결 구도 지속 및 중국의 유엔 가입을 장기간 저지시킴으로써 소련으로서는 장기 평화와 국제영향력을 동시에 구가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중국의 유엔 가입은 무려 한 세대나 늦추어졌다. 그러나 스탈린의 방혈전략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 이후의 단기 적대를 거쳐 미국과 중국은 급속히 가까워졌으며, 궁극적으로 멸망한 것은 두 나라가 아니라 소련이었다.

이념 대신 국익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선택은 오늘의 관점에서도 주의 깊게 판독해야 한다. 마오쩌둥은 청년 공산주의자 시절 미국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실제로 오랜 중·소 갈등으로 인해 1949년 7월의 향소(向蘇)일변도정책 공표 이전까지 중국 공산당은 소련 못지않게 미국과도 관계를 구축하려 시도하였다. 1945년 1월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마오와 저우언라이가 워싱턴을 방문하여 협상을 하고 싶다는 비밀 서신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현지 미국 외교관들로 인해 그들의 서신은 루스벨트에게 전달되지 않았고, 끝내 답신을 받지 못하였다. 대일 전쟁에서의 협력의 필요성, 그리고 2차대전 종전 전후 미국의 국공합작 노력에 비추어, 이들의 방미 의사가 실제로 전달되었을 경우 워싱턴은 수락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중국의 대미 접근 노력은 2차대전 이후에도 시도된 바 있다. 한국전쟁 직전인 1949년 6~7월에 집중되었다. 건국을 앞두고 완전히 파탄난 경제 회복을 위해 미국과의 관계개선은 절실했다. 중국은 이념을 넘어 국익의 관점에서 미국과 관계를 구축하려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과 국부의 존재 및 미국 정부 내의 관료적 갈등을 포함한 복합적 요인들로 인해 그러한 관계 구축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미·소, 미·중, 중·소 사이의 균형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형성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중국의 적극적인 미·중관계 정상화 노력에 비추어, 한국전쟁으로 인한 적대시기를 제외하면, 중국은 오랫동안 대미 관계를 개선하려 구상해왔음을 알 수 있다.

‘제국 중국’ 부활의 출발점이 한국전쟁인 것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중국은 장기간 국가고립의 부정적 결과 못지않게 서방 위협 저지라는 긍정적 효과를 달성했다

중국, 파병 이어 정전협상 주도

만약 마오와 저우언라이가 데탕트 시기가 아니라 한국전쟁 이전에 미국 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면, 그리하여 중국혁명과 미·중관계의 향방이 달라졌다면 미·소·중의 관계는 실제와는 크게 달랐을 것이다. 한국전쟁의 도래 역시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에서 혹독한 전쟁을 치른 한 세대 후에나 만났다. 전후 만남에서 두 나라는 자기들이 한국에서 싸우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일말의 안타까움을 드러내었으나 한국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말에 대한 신뢰는 또 다른 문제다. 중국은 한국전쟁 이후 소련을 향해서는 중·소 갈등 당시 자신들이 한국전쟁에서 일선에 서서 막대한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소련은 2선에 머물 수 있었다며, 방혈과 은폐를 추구한 소련의 국익추구 행태를 격렬히 공격하였다.

한국전쟁의 국제적 영향은 21세기까지 직결된다. 오늘날 세계질서를 좌우하는 두 제국은 미국과 중국이다. 그것은 안보와 경제를 포함하여 국제질서의 핵심 요인 거의 모든 부면에서 그러하다. 그런데 ‘제국 중국’ 부활의 출발원점이 한국전쟁이었다는 사실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동서조우 이후 전통 중화제국의 붕괴와 국권상실 이래 중국이 서양세력과의 대결에서, 자신들의 관점에서 패배하지 않은 첫 번째 계기는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그것도 건국 1년 만에 참전한 전쟁에서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밀고 밀리는 공방 끝에 무승부를 이룸으로써 중국으로서는 세기를 넘는 치욕과 수치를 씻어낼 수 있었다. 나아가 한국전쟁 정전협정은 중국으로서는 국제공법체제에 편입된 이후 지속되던 불평등 조약 시대를 종식시키고 서방국가들과 맺은 최초의 대등한 합의였다.

중국은 한국전쟁 참전으로 인한 장기간의 국가고립이라는 부정적 결과 못지않게 서방 위협의 저지라는 긍정적 효과를 동시에 달성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한국전쟁은 오늘날까지 미국과 중국이 군사적으로 대규모로 충돌한 최초이자 최후의 사건이었다. 한국전쟁 이전과 이후 두 나라는 정규군 사이에 대규모로 충돌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중국혁명과 대만문제에서조차 두 나라는 무력 대결을 치른 바 없었다. 한국전쟁은 오늘날까지 두 대국이 정면충돌한 유일한 사건인 것이다.

그러나 미·중관계 형성 못지않게 중요한 한국전쟁의 영향은 중·소관계의 재편이었다. 동시에 한반도문제에 대한 중·소 사이의 발언권과 영향력의 역전이었다. 한국전쟁 이전에 동아시아문제, 특히 한반도문제에서 최고의 발언권은 단연 소련에 있었다. 미국과 함께 38도선에 의한 한반도 분할을 합의한 것도 소련이었고, 38도선 이북에 대한 군사점령도 소련이 주체였다. 미국 및 유엔에 맞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의 건국을 주도한 것도 소련이었다. 김일성과 함께 한국전쟁 결정을 주도한 것도 스탈린이었다.

한국전쟁은 이를 완전히 역전시켰다. 한국전쟁의 전개와 종전과정에서 한반도문제에 대한 중국과 소련의 역할과 영향력은 결정적으로 뒤집어졌다. 중국군의 대거 참전과 함께 전쟁의 실질적인 주도권은 스탈린에서 마오쩌둥으로, 모스크바에서 베이징으로 넘어갔다. 전시에는 군사가 정치를 좌우한다. 현지 전황은 군대를 대거 파병한 중국에 달려 있었다. 조·중 국경 부근까지 전진했던 유엔군을 막대한 희생과 함께 후퇴시킨 것도 중국군이었으며, 현장에서 정전협상을 주도한 것도 중국이었다. 물론 스탈린은 전체 방향을 제시하는 지위는 끝까지 놓지 않았으나 그것은 현장에까지 관철되지 못했고, 그마저 그의 사망으로 인해 정전 이전에 종식되었다.

1949년 12월21일 스탈린의 70세 생일기념대회에서 마오쩌둥과 스탈린이 나란히 앉아 박수 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미·중관계 형성에 못지않게 중요한 한국전쟁의 영향은 중·소관계 재편이다
공산진영 대표국가를 소련에서 중국으로 교체했고, 그것은 한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근본이다

중 역할·책임 주의 깊게 판독해야

마오쩌둥과 공산 중국은 대규모 정규군 병력의 파병에 이어 실제의 정전협상을 지휘하였다. 종종 스탈린과 상의를 하거나 그의 지시를 따랐지만, 협상 현장의 구체적 진행과 주도권은 모스크바가 아니라 베이징이 장악하고 있었다. 중국은 고위급 대표단을 파견하여 정전협상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오쩌둥은 자신의 최측근을 개성에 파견하여 비밀리에 정전협상 전 과정을 이끌게 하였다. 김일성과 함께 한국전쟁의 실질적 결정자이자 책임자인 동시에 주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장막 뒤에 숨어 드러나지 않으려 했던 스탈린의 음흉한 전략의 불가피한 산물이자 현실이었다.

그 결과 1945년 한반도 분할합의와 1953년 정전합의의 공산 측 대표는 완전히 바뀌었다. 무엇보다도 중국은 한반도 정전협정의 서명 당사국이 되었다.

오늘의 한반도 정전체제는 1945년 미·소의 분단합의와 1948년 두 개의 한국 건국이 아니라 1953년 한국전쟁 정전합의에 근거한다. 요컨대 국제합의체제이자 한국전쟁 전후체제인 정전체제를 단순히 남북 분단체제로 인식한다면 한반도문제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중국은 한반도 정전협정에 유엔과 함께 직접 서명 당사국으로 등장하였다. 참전을 통한 미국 저지와 북한 구출 역할, 그리고 정전협정 서명 당사국 위상으로 인해 전후 한반도문제에 대한 공산 진영의 주도권은 소련에서 중국으로 넘어갔다.

만약 한국전쟁이 없이 미·소 분할합의체제가 유지되었다면, 또 유엔과 중국이 아니라 유엔과 소련 사이에 정전회담과 정전협정이 완결되었다면 훗날 소련 붕괴에 따른 한반도 냉전의 해체와 (동독과 같은) 북한 붕괴를 통한 평화통일의 달성은 어렵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는 소련해체에 이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속붕괴 사례에 비추어 볼 때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경로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한반도문제에 대한 공산진영의 대표국가를 소련에서 중국으로 교체하였고, 그것은 한반도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근본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국전쟁은 미·소가 주도하는 얄타체제의 동아시아로의 확산을 저지하는 동시에 동아시아 냉전질서를 유럽과는 완전히 다르게 변모시켰던 것이다. 미국에 맞선 유럽냉전의 대표가 소련이었다면 동아시아 냉전의 대표는 중국이었다.

한국전쟁은 전쟁 시작 및 발발의 국제주체와 종전 및 종결의 국제주체가 뒤바뀌는 극히 희귀한 전쟁사례였다. 그리하여 한국전쟁 입구와 출구에서의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은 완전 역전되었다. 이념과 구도가 아니라 이익과 역할 때문이었다. 미·중 대결 구도의 도래는 물론 한반도문제에서 소련 탈락과 중국 부상의 계기가 한국전쟁이었다는 점은, 후술하듯, 한반도 정전체제와 북핵문제의 지체와 진전에서 중국의 역할과 책임 때문에 주의 깊게 판독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반도문제는 국제문제로부터 비롯되는 동시에 항상 국제관계의 변혁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전쟁 출구로부터 근본적 탈출을 모색할 때이다.

■필자 박명림 교수



연세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다. 제주 4·3(석사)에 이어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박사)로 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래 평화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현상 연구에 천착해왔다. 정치학자로서, 역사학자로서 전쟁과 평화, 생명과 인간, 그리고 국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2> <다음 국가를 말하다> <역사와 지식과 사회>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등이 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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