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칼럼] 법치보다 정치가 필요한 시간

2023. 7. 3.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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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 정치정책부 차장

윤석열 대통령이 연설이나 공식 석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가 '법치주의'다. '법치주의'는 윤석열 정부 국정운영의 원칙이자 기준으로 볼 수 있다.

법치주의는 사전적 의미로 '행정은 의회에서 제정한 법률에 의거해 행해야 한다는 원칙'을 뜻한다. 왕권이나 독재에 의한 지배가 아닌 법의 지배를 근간으로 하는 정치원리다. 윤 대통령은 화물연대의 집단운송거부 사태 때나 건설노조의 대규모 파업 사태 등이 벌어졌을 때는 '노사 법치주의'라는 표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모든 국정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한다는 것, 그게 윤석열식 법치주의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법치'에 최우선 가치를 부여하면서 상대적으로 '정치'가 등한시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정치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을 법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취임 후 1년동안 두차례 재의요구권, 즉 법안 거부권을 행사했다. 첫번째 거부권은 쌀 수요 대비 3∼5%의 초과 생산량이 발생하거나 쌀값이 전년 대비 5∼8% 하락할 때 정부가 초과 생산된 쌀을 전량 매입해주는 내용의 양곡관리법 개정안이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재정에 과도한 부담을 줄 뿐 아니라 쌀 초과생산을 부추긴다는 부작용이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40여곳의 농민단체조차도 반대했다. 그런데도 더불어민주당은 비판을 수용하지 않고 법안을 강행처리했고, 윤 대통령은 재의요구로 대응했다.

두번째 거부권은 간호사의 직무영역을 규정한 간호법 제정안이다. 의료계의 반발과 의료체계 전반에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면서 윤 대통령이 재의를 요구했다. 윤 대통령이 돌려보낸 두개의 법안은 최종적으로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여소야대'라는 불리한 정치 국면에서 법이 허용한 재의요구권이 대통령에게 큰 무기가 된 셈이다. 재의요구권은 3권 분립의 원칙에 근거해 입법부의 불합리한 입법에 맞설 수 있는 행정부의 권한이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은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민주당 등 야당은 지난달 30일 열린 본회의에서 여당을 배제한 채 일명 '노란봉투법' 부의 안을 가결했다. 노란봉투법은 노동조합의 파업 등에 기업이 과도한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도록 제한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이다. 민주당은 이르면 이달 10일께 7월 임시국회를 열어 안건을 상정해 표결을 시도할 계획이다.

노란봉투법을 반대해온 국민의힘은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인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로 대응한다는 방침이지만, 의석수에 밀려 표결을 막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노란봉투법은 노동권이 사측의 과도한 손해배상 청구로 제한받지 않도록 하는 취지의 법이라는 게 민주당 주장이지만, 경제계는 가뜩이나 노동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더 기울게 만들고 불법 파업을 조장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예고된 대로 민주당 주도로 노란봉투법이 본회의를 통과한다 해도 윤 대통령이 재의를 요구하는 수순을 밟을 것으로 예상된다. 세번째 거부권 행사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김승남 민주당 의원은 이날 새로운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정부가 매년 양곡의 생산비·물가상승률·양곡 재배 농가 소득 등을 고려해 쌀 목표 가격을 정하고, 쌀값이 목표치에 미달할 경우 차액을 보전하는 내용이다. 또 같은 당 윤준병 의원도 농외소득 3700만원 미만이면서 일정 조건을 충족한 '기본직접지불금 지급 대상자'가 쌀 생산비용의 110% 가격으로 쌀 매입을 요청할 경우, 정부가 사들이도록 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포퓰리즘 비판을 받은 기존 법안과 대동소이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다시 나온 것이다.

여야 합의의 입법은 현재로선 기대난망이다. 민주당은 입법독주를 계속하고 소수당인 여당은 속수무책이다. 이런 구도대로 라면 민주당도 대통령으로 하여금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유도해 국회를 무시한다는 이미지를 덧씌우려 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오죽하면 대통령이 '국회 무시'라는 비판 가능성에도 거부권을 행사할까? 정치는 대화와 협상이고, 양보와 타협 없이는 불가능하다. 야당이 의석수로 밀어붙이고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으로 거부하는 악순환을 거듭하는 것은 법치도, 정치도 아니다.

김미경기자 the13ook@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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