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건축 세계 <5> 플레이타임] 사람을 존중하고 환대하는 업무 환경과 협업 생태계
과거 20세기 도시의 모습은 기술의 진보와 소비주의 가속화에 따라 빠른 속도로 변화했다. 콘크리트, 강철, 유리로 지어진 고층 건물들이 이전의 맥락과 상관없이 도처에 솟아올랐다. 획일화된 가로(街路·street)와 건축 공간은 대량생산된 자동차와 상품으로 가득 찼다. 대다수의 도시가 과거를 뒤로한 채, 미래를 응시하며 경주마처럼 질주했다. 그들이 현대화의 필두로 내세웠던 개념은 ‘기능성’과 ‘합리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오히려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이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든다. 인간은 빠르게 현대화하는 환경의 속도에 충분히 적응할 수 있는가. 기능적이고 합리적인 공간이 인간에게 단편적인 행동과 패턴을 강요하지 않는가. 다시 말해, 이렇게 구축된 환경이 인간의 자율성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도시와 인간관계에 질문을 던지다
프랑스 감독 자크 타티(Jacques Tati)는 1967년 영화 ‘플레이타임(Playtime)’을 통해 시대 변화와 기술이 결합한 도시 환경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자크 타티는 영국의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미국의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과 함께 코미디 영화계의 세 거장으로 꼽힌다. 영화는 1960년대 파리 근교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감독은 실제로 1만5000㎡의 땅에 ‘타티빌(Tativille)’이라는 가상의 축소 도시를 건설하고 촬영했다. 회색빛 철재와 사각형 창의 획일적인 박스형 건물들과 내외부 구별이 없는 투명한 유리 벽, 일률적인 내부 칸막이와 복도, 엘리베이터 그리고 동일한 포장도로들은 개별 개성이 부재한 도시 구조를 보여준다. 감독은 이렇듯 균일하고 거대한 환경에 놓인 ‘사람’을 조명한다. 영화 속에는 주인공 윌러(Hulot)가 등장하지만, 카메라의 시선은 한 개인에게만 집중하지 않는다. 그 대신 감독은 장면마다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물리적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을 중점적으로 표현한다. 등장인물은 기능성과 합리성으로 구축된 공간의 시스템에 의해 통제당하지만, 그와 동시에 일탈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획일적인 도시 환경 속에서 쉽게 길을 잃고 바닥의 단 차이에 걸려 넘어지며, 유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부딪히는 등의 해프닝이 영화 곳곳에 묘사된다.
자율 소통이 없는 업무 공간의 모습들
비슷한 상황은 실내 공간에서도 이어진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업무 공간은 단편적인 기능성을 강조한 견고한 환경으로, 인간의 유연한 자율성과 쉽게 충돌한다. 이 공간은 엄격한 질서로 나열된 사각형 형태의 개인 셀(cell)로 이뤄져 있다. 각 셀은 반복되는 크기와 재료의 칸막이벽으로 분리돼 있으며, 개인 사이의 소통을 제한한다. 시각적으로 차단된 셀들을 연결하는 유일한 수단은 사내 방송 시스템뿐이다.
이러한 모습은 20세기, 표준화된 제품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시스템을 지칭하는 ‘포디즘(Fordism)’을 상기시킨다. 포디즘의 대표적 사례는 자동차 공장의 컨베이어 조립 라인 시스템이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노동 과정을 단순 반복적인 것으로 분화한 환경은 개인에게 주어진 노동에만 충실하기를 강요한다. 이와 비슷하게 영화 속 공간도 개인의 업무 집중과 효율성을 단편적으로 극대화하기 위해 설계된 시스템으로 연출됐다.
하지만 사람은 기계 부품과 달리 타인과 소통과 자율적인 관계가 필요하다. 영화의 업무 공간에서도 두 인물이 만나 협의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러나 획일적인 격자형 복도에서 길을 잃고 서로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들은 비록 같은 층에 있음에도 결국 만나지 못하고, 각자의 셀로 돌아가 유선 전화로 대화한다.
제약사 로슈 복합 업무 시설과 협업 생태계
오늘날 21세기 건축은 어떻게 기존 업무 수행 방식에 대한 대안을 제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디지털 업무 수행 방식과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시기의 비대면 근무로 인해 최근 더욱 부각되고 있다.
스위스의 건축가 크리스트 앤드 간텐바인(Christ & Gantenbein)은 글로벌 제약사 ‘로슈(Roche)’를 위한 복합 업무 시설에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현대적 해법을 탐구했다. 이 건축물은 2021년에 완공됐으며, 스위스 국경 근처의 로슈 캠퍼스에 있다. 캠퍼스는 100여 년 전에 로슈의 첫 번째 제조 기지로 설립된 곳이다. 캠퍼스 내 다양한 건축물들은 제조 중심의 산업 공간에서 상호작용의 인간 중심 공간으로 변화해 온 협업 문화의 진화 과정을 보여준다. 건축가는 새 업무시설의 목표가 직원들에게 ‘원격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제공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형태의 만남과 협업이 가능한 포용적이고 위계 없는 공간을 기본 개념으로 삼았다. 디지털이 아닌 직접적이고 진정성 있는 교류를 촉진하기 위함이다.
회색빛 알루미늄 패널과 수평 유리로 구성된 박스 형태의 5층 건물은 외관상 영화 속 ‘타티빌’의 건물과 유사해 보인다. 주목할 점은 45도로 잘린 네 모서리의 개방성과 이를 강조하는 대각선 철재 구조다. 이는 계단 등 주요 구조를 모서리에 배치해 모든 층의 중앙을 비우고, 기둥 없는 자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형식이다.
건축가는 중앙 공간의 유연성을 유지하기 위해 스위스 디자인 스튜디오, 인치퍼니처(INCHfurniture)와 협업해 이동식 가구를 계획했다. 가구는 총 10가지이며 천장에 매달린 공간 ‘스카이 박스’, 좌석과 화분이 결합한 ‘포레스트 서클’, 유리 회의실 ‘미팅 허브’, 계단형 좌석 세트 ‘애질리티 스페이스’ 등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에 더해 ‘크리에이티브 랩’ ‘유연한 워크스테이션’ ‘커뮤니티 테이블’ ‘사막 지역’ ‘주거 공간’ 그리고 ‘주방’ 요소도 포함됐다. 경쾌하고 밝은 색상의 가변적 가구로 이뤄진 공간은 엄격한 건축 시스템과 대조를 이룬다. 이들은 열린 공간을 느슨하게 구분하고 이용자의 자율을 따라 움직이면서 전체 내부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이는 사회적 상호작용, 창의적 토론, 우연한 만남과 개인적 사색 등이 공존하는 협업 환경을 형성한다. 각 모서리의 계단은 주변 자연과 캠퍼스, 도시의 전망을 건축 내부로 끌어들이고, 엘리베이터와 함께 모든 층을 긴밀하게 연결한다. 이용자는 총 8개의 수직 동선으로 건물 전체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2, 3층 중앙에는 가변 벽을 이용해 세 개의 개별 홀로 분할할 수 있는 강당이 배치됐다. 개인, 그룹, 회사 전체 간의 교류를 강화하기 위해서다.
유기적으로 통합된 협업 생태계의 중심에는 사람에 대한 환대와 상호작용이라는 존중의 메시지가 있다. 사람들이 사무실로 출근해야 하는 동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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