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번역만 해서는 반쪽짜리 한문 원문 교육도 병행해야죠
3000책 국역 DB 국민에 제공
"대중이 고전문화 향유해야
'반짝' 한류 넘어선 문화강국"
"한문 고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그치지 않겠다. 대중이 고전을 향유할 수 있게 고전 교육 사업에도 매진하겠다."
지난달 1일 취임한 김언종 한국고전번역원장(고려대 한문학과 명예교수·71·사진)이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포부를 밝혔다. 한국고전번역원(옛 민족문화추진회)은 승정원일기, 일성록, 조선왕조실록, 한국문집총간 등 한국의 고전문헌을 한글로 번역해 전통문화 계승과 활용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 교육부 산하 학술기관이다. 경희대와 고려대에서 교수를 지내며 한국 고전을 연구한 김 원장은 한국고전번역학회 회장, 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장, 한국실학학회장, 퇴계학연구원 부원장 등을 역임했다.
김 원장이 고전 문헌의 번역과 교육을 병행하려는 것은 한글 번역이 고전 문화에 '양날의 검'이 될 수 있어서다. 한글 완역이 이뤄지면 접근성이 향상돼 고전이 폭넓게 활용될 수 있지만 한문으로 된 고전 원문은 수요가 더 떨어져 오히려 사장될 위험이 커진다. 번역원은 이를 막기 위해 고전을 수집·정리·번역하는 사업과 함께 특강과 한문 고전 자문 서비스, '고전산책' 메일링 서비스, '고구마' 애플리케이션 등 '고전 널리 활용하기'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김 원장은 "한글 번역이 되레 한문 고전과 현대인을 단절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한국고전번역원의 역할은 고독사한 시신을 처리하는 업체처럼 1500년 한문 문화에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 전락하게 된다"며 "한국고전번역원이 '한국고전문화원'으로 불릴 만큼 고전 교육 사업을 앞으로 더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번역원은 국민이 고전 국역본을 손쉽게 활용할 수 있게 번역 성과를 디지털화해 제공하고 있다. 번역원이 구축·운영하는 한국고전종합DB에는 3153책(2022년 기준)의 번역본이 실려 있고 연간 접속자 수는 254만9111명(2022년)에 달한다. 2015년 117만5268명에서 7년간 2배 넘게 늘었다. 번역원은 번역 효율을 높이기 위해 초벌 번역 등에서 인공지능(AI)을 활용하는 기술도 개발 중이다.
고전에 대한 김 원장의 열정은 어린 시절 집안에서 받은 전통 교육에서 시작됐다. 비서 김대락, 일송 김동삼 등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의성 김씨 귀봉파 15대손으로 경북 안동에서 자란 김 원장은 부친과 스승에게 논어, 맹자 등 유교 경전을 배웠고 경희대 국문과에 들어가서는 고전문학을 탐독했다. 국립대만사범대 대학원에서는 한국 거유(巨儒)들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정약용 연구로 학위 논문을 썼다. 김 원장은 "한국의 한문 고전은 일본, 베트남 등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보다 양적으로 훨씬 많을 뿐 아니라 퇴계, 율곡, 성호, 다산 등 위대한 성현들의 정신이 담긴 보물창고"라며 "전 세계적으로 한류가 인기를 끌고 있지만 조상이 남긴 위대한 문화유산을 일반 대중이 적극적으로 향유할 때 진정한 문화강국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현대인들이 고전에서 삶의 조언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문과 함께 수천 년간 한국인의 정신을 지탱해 온 전통문화가 이익을 좇는 현대인에게 윤리적 지침을 제공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 원장은 "가령, 이이의 '격몽요결'에는 '兄弟 同受父母遺體 與我如一身(형제는 부모의 몸을 똑같이 받아 한 몸과 같으니)…今人兄弟不相愛者 皆緣不愛父母故也(오늘날 사람들이 형제간에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모두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데서 비롯한다)'라는 말이 나온다"며 "모두가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가족, 친구, 이웃 간에 신의와 애정을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다"고 말했다.
[김형주 기자 / 사진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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