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전세사기 집 낙찰자의 독촉···폭우 퍼붓던 날, 서럽게 짐을 뺐다
“503호님, 오늘 이사 잘 하세요. 비가 많이 온다는데 조심하시고요.”
지난달 29일 오전 7시 고용현씨(가명·34)가 인천 미추홀구의 A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자 마침 출근하던 1102호 부부가 인사를 건넸다. 이날은 고씨 가족이 전세사기 피해를 당한 A 아파트를 떠나는 날이었다. 아파트 한 동 전체가 전세사기 피해를 당한 이곳에서 지난 4월 숨진 피해자가 나오자 정부는 경매 유예 방침을 발표했다. 하지만 고씨의 집은 이미 경매에 낙찰돼 손 쓸 도리가 없었다.
부푼 꿈을 안고 2018년 신혼 생활을 시작한 집으로 올라가는 고씨의 발걸음이 무거워보였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4살 딸은 지금까지 5층 집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렸다. 하지만 이사가는 긴급주거지원 주택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당분간 고씨와 딸이 층수 버튼을 누를 일은 없다. “마음이 아프죠.” 딸이 4층까지 오르며 ‘계단 오르기 힘들다’고 했던 것을 떠올린 고씨가 말했다.
집에 들어서 불을 켠 고씨는 대형폐기물 스티커부터 가구에 붙이기 시작했다. 따뜻한 나무색 옷장과 다리를 뻗고 앉을 수 있는 리클라이너 소파 모두 고씨와 부인이 결혼할 때 공들여 고른 가구들이다. 이사 가는 빌라는 A 아파트보다 9평 정도 작고 거실 공간이 없어 짐을 최대한 줄여야 했다. “다 챙겨가면 비좁지 않을까.” 딸을 돌봐야 하는 아내 대신 이사를 도우러 온 장모 박순영씨(가명)의 걱정을 들으면서도 고씨는 딸이 타고 다니는 미니자동차 장난감만은 한쪽에 소중히 챙겼다.
“센터에서 이건 안 챙겨줄 것 같은데.” 이사를 처음 해보는 사위가 이삿짐센터가 오기 전까지 안절부절 못하자 박씨가 안쓰럽게 쳐다봤다. 고씨는 격주로 야간근무를 하는 탓에 전날 오후 7시부터 이날 아침까지 밤을 꼴딱 새고 이사를 시작한 터였다. 박씨는 “나도 한숨도 못잤지만 일 하느라 눈도 못 붙이고 나온 사위랑 우리 딸 마음은 어떻겠냐”면서 “전세사기는 정말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짐승도 그렇게는 안 할 것”이라고 했다. A 아파트에서 전세사기 피해자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박씨는 “무서웠지만 딸아이 부부에게 ‘잘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분명 나아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내가 엄마잖아요. 애들한테 힘을 줘야죠.”
고씨 부부는 A 아파트에 4년 8개월 전 입주했다. 우선 전세로 살면서 돈을 열심히 모아 집을 장만할 계획이었다. 이후 딸이 태어나자 A 아파트에서 좀 더 있어보기로 했다. 박씨는 “애들한테 그때 그냥 나가라고 할 걸 그랬다. 너무 후회가 된다”고 했다. 첫 계약부터 재계약까지 맡았던 공인중개사는 “임대인이 부잣집 자제이고,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했다. ‘중개매물에 대한 사고는 중개사 협회가 책임지겠다’는 공제증서도 보여줬다. 하지만 모두 거짓말이었다. 고씨 부부뿐 아니라 윗집, 아랫집 모두 지난해 경매에 넘어갔다.
집을 마련하겠다는 꿈은 사라졌다. 고씨 가족은 지난 5월 중순부터 발품을 팔아 긴급주거 주택 6곳을 돌아봤다.고씨 회사와 지하철역에서 가까운 곳을 얻었지만 6개월이 지난 뒤에도 계속 지낼 수 있을지는 모른다고 했다. 긴급주거 연장을 받지 못해도 다른 보금자리를 구할 처지가 못 된다. 전세사기로 날린 전세보증 대출금을 갚고 긴급주거 주택 월세 28만원을 내고 나면 돈이 모일 리 만무하다.
오전 8시 이삿짐센터 직원 4명이 고씨 집에 도착했다. “거실에 있는 소파랑 안쪽 방에 있는 옷장은 안 가져간다. 폐기스티커는 붙여뒀다”고 설명한 고씨와 박씨는 1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복도로 나왔다. 이삿짐을 포장하려 박스테이프를 뜯는 소리보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날씨마저 안 도와준다.” 거세지는 빗줄기를 말없이 지켜보던 박씨가 읊조렸다.
이삿짐 포장이 끝나길 기다리는 동안 주민들 사이에서 착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고씨의 얼굴이 굳어갔다. “제가 야간근무 한다고도 말씀드렸어요. 그런데도 이렇게 전화를 쉬지 않고 하세요.” 고씨의 통화목록에는 낙찰자가 오후 6시부터 밤까지 하루 12번 이상 전화를 건 기록이 남아있었다. 고씨가 전세사기 피해자의 장례식장에 있을 때도, 야간근무를 하던 중에도 전화를 건 낙찰자는 이사를 앞두고도 “6월 30일까지 안 나가면 월세 70만원을 내야 한다” “이사 제대로 나가는지 지금 확인하러 가겠다”고 연락해왔다.
‘집을 보러 오신 분께서도 또다른 피해자나 공모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전세사기 피해 아파트임을 알리는 현수막이 붙은 1층 현관문으로 이삿짐이 들려나가길 반복했다. 주차된 이사 트럭 옆으로 아파트 관리업체 직원이 1층 주차장에 고인 빗물을 퍼내고 있었다. 전세사기꾼 남헌기 일당이 건물을 부실하게 세운 탓에 매년 장마철이면 주차장에 물이 역류하거나 전기가 끊기기 일쑤였다. 고씨와 인사를 나누던 6층 주민은 “이렇게 비가 오면 올해는 또 어떤 문제가 생길지 걱정”이라고 했다.
오전 9시가 가까워지자 어린이집 등원버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1층으로 내려왔다. 9층 주민 B씨의 5살 아들은 같이 놀던 고씨 딸의 장난감이 이사 트럭에 실리는 모습을 유심히 쳐다봤다. B씨는 “원래 이 아파트에서만 아이들 8명이 같은 등원버스를 탔는데 하나둘 이사 가면서 이제 3명만 탄다”면서 “친구들이 없어지니까 글씨도 읽을 줄 모르는 아들이 ‘우리도 이사 가야 하냐, 우린 언제 이사가냐’고 묻는다”고 했다. B씨 아들을 제외한 두 자매의 집도 곧 이사를 간다. A 아파트에선 이날까지 60세대 중 14세대가 떠났다.
“이사차가 출발할 때는 비가 좀 그쳐야 할텐데요. 희재(고씨 딸·가명) 할머니 그래도 이사 잘하세요.” B씨가 폭우 소리에 묻히지 않는 큰 목소리로 박씨에게 인사했다. 주민을 떠나보내고도 A 아파트에 남은 주민들은 이사간 이들도 올 수 있도록 계속해서 매달 반상회를 열 계획이다.
김송이 기자 songy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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