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떠나도 문장은 영원…세계문학 번역 1세대의 종언
앞서 박형규·이윤기도 떠나
안, 헬러 소설 '캐치-22' 아껴
자택 6단책장이 그의 번역서
박, 톨스토이 전권 한국어 번역
이, '장미의 이름' 등 명서 옮겨
"1970년대 명동 중국대사관 근처에 가면 미군이 팔고 간 책만 모은 서점이 있었죠. 한국에선 이름도 안 알려진 작품인데 수십 쇄를 찍은 책이면 '이거다' 싶었습니다. 사람이 느끼는 감정에 국경이 있겠습니까?"
고(故) 안정효 작가(1941~2023)가 2년 전 자택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기억이다. 번역가로서 그가 생전에 진행했던 마지막 인터뷰였다. 휴대전화는커녕 PC도 없던 1970년대 영어사전 박엽지에 침 묻혀가며 번역한 안정효의 책은 150권에 달했다. 오늘날 문학계 일군의 작가들은 학창 시절과 문청 시절, 이어 성년에 이르러서도 안정효의 자장 안에서 독서의 매혹을 느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향년 82세로 안정효 작가가 별세하면서 세계문학을 한국에 들여온 1930~1940년대생 '1세대 번역가'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 올해 4월엔 푸시킨 메달을 받은 러시아문학 대가 고 박형규 고려대 교수(1931~2023)가 떠났다. 앞서 늘 1세대 번역가로 거론했던 고 이윤기 작가(1947~2010)도 향년 63세의 이른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진 바 있다. 문장으로 남은 문학주의자들의 작품을 살펴봤다.
고 이어령 당시 문학사상사 주간이 "영어로 소설을 쓰는 학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서강대생' 안정효를 찾아가면서 안 번역가는 문학계에서 첫발을 뗐다. 그해 노벨상 수상작가 패트릭 화이트의 단편을 '단 하루' 만에 번역해 이어령 주간에게 제출한 안 작가는 일생 동안 150권 넘는 번역서를 한국에 소개했다.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 콜린 매컬로의 '가시나무새', 엘리아 카잔의 '욕망의 강', 존 업다이크의 '토끼는 부자다', 그레이엄 그린의 '조용한 미국인', 어윈 쇼의 '야망의 계절', 아이리스 머독의 '바다여, 바다여' 등은 안정효가 홀로 써내려간 세계문학전집에 준한다. 특히 생전 안정효의 불광동 자택 거실엔 위엄을 뽐내는 책장이 하나 있는데, 6단 높이 책장 전체가 안정효의 번역서다.
"서사의 재미와 번역의 완결성 측면에서 가장 아낀다"고 안 작가가 밝혔던 책은 조지프 헬러의 장편소설 '캐치-22'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256비행중대 대위 요사리안이 제대를 위해 발버둥치는 '자신이 미쳤다는 걸 아는 미치광이는 진짜 미친 게 아니니 제대할 수 없다'는 군내 규정 '캐치-22'에 발목이 잡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베트남전 당시 현장에 있던 안 작가의 내면과 길항한다. 안 작가는 백마부대 소속 종군기자로 삽화를 그리며 베트남 정글을 누볐다.
'러시아 문학 1세대 번역가' 박형규 교수의 생을 채운 키워드는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였다. 독자가 읽은 톨스토이 책의 대다수는 박형규 교수가 언어의 옷을 갈아입혔다.
1800년대 러시아 격변의 역사를 559명의 인물로 창조한 '전쟁과 평화', 배심원으로 참석한 한 공작이 한때 정욕을 느꼈던 여인이 피고임을 확인하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심판'을 고민한 '부활', '행복한 가정은 고만고만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는 첫 문장이 일품인 '안나 카레니나'는 전부 박 교수가 번역했다. 톨스토이의 '예술적 유서'인 장편 '하지 무라트'도 최근 박 교수 번역본으로 서점을 찾았다.
1980년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처음 한국어로 소개한 주인공은, 이제 전설로 남은 그 이름 이윤기 작가였다. 젊은 아드소와 윌리엄 수도사가 수도원에서 벌어진 연쇄살인 사건을 추적한 이야기를 담아낸 위대한 서사는 인류 금서의 역사를 읽어내는, 가장 빛나는 상상적 열쇠로 기억된다.
토머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을 1991년 번역해 소개한 이도 이 작가였다. 영화 '양들의 침묵'은 현대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영화로 1992년 오스카 그랜드슬램(주요 부문 5관왕)을 차지했다. 이윤기판 '양들의 침묵'은 1999년 출판사 청해에서 다시 출간됐지만 현재는 절판됐다.
번역가의 명성 이면에서, 이윤기 작가는 현재도 스테디셀러 작가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230만부가 판매됐는데 지금도 '국민 신화 책'으로 불리며 증쇄 중이다. 크레타왕 미노스가 다이달로스에게 지시해 만든 미궁에서 아리아드네가 실타래를 이용해 탈출하는 내용을 담은 서문('아리아드네의 실타래')으로 열리는 이 책에서 이 작가는 세계라는 미궁에서 문학을 통해 인간으로 사는 방법을 들려준다.
"신화라는 이름의 자전거 타기를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라. 일단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기 바란다. 필자가 짐받이를 잡고 따라가겠다"고 썼던 이 작가의 문장은 여전히 살아 만인의 가슴에 차오른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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