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워도 따뜻한 ‘집이라는 그리운 말’[김윤정,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
intro
“나는 독서 중의 독서, 구극(究極)의 책 읽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라고 생각한다.”(김무곤 교수 ‘종이책 읽기를 권함’ 중에서)
가정을 이루었고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나는 늘 자신의 쓸모에 대해 걱정했다. 하지만 2011년 겨울. 이 짧은 문장 하나가 내 인생을 극적으로 바꾼다.
어떠한 용도도 없는 가장 순수한 읽기라니! ‘별 의미도 목적도 없이 읽는 행위’ 위에는 시간이 나이테처럼 축적됐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임계점을 지나면서 나는 진정한 풍요로움을 맛볼 수 있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쓴다. ‘김윤정,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 그 네 번째는 미진의 ‘집이라는 그리운 말’(책과이음)이다.
혼자 속으로 떠올리거나 입 밖으로 꺼내면 신기하게도 마음에 바람을 불러오는 말들이 있다. 예컨대 ‘보고 싶어’라는 말은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도 당장 만나고 싶게 내 마음을 부추긴다. 친구의 생일을 핑계 삼아 김밥을 말아 집으로 갔다. 볕이 좋은 식탁에 마주 앉아 밀린 수다를 떨었다. 스물다섯의 우리가 살며시 다가와 옆에 앉아 소곤거렸다.
보고 싶다고 말하면 즉시 볼 수 있는 것들은 의외로 많다. 하지만 보고 싶어도, 보고 싶은 그 마음이 간절해도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시골 외갓집 아궁이에 불 때는 냄새, 다리를 주물러 드리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할머니의 손길, 봉고차라고 불렀던 9인승 승합차를 타고 왁자지껄 사촌들과 함께 떠났던 피서, 동생이 데려와 키우던 강아지의 부비부비,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품에 안았던 갓난아기의 감촉, 어린이집 입소식 날 울면서 들어간 아이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리며 담장에 서서 몰래 흘렸던 눈물. 형체가 없어서 보고 만지거나 느낄 수 없는 것들,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시간들 그리고 만날 수 없는 사람들. 그런 것들이 나는 그립다. 못내 섧다. 그리움은 보고 싶음과 다르다. 다시 볼 수 없어서, 막연해서 더 그리운 건지도 모른다.
“시간도 얼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장 좋았던 순간을 꽁꽁 얼릴 수 있다면, 그래서 내 마음이 허락할 때 녹여서 보고 들을 수 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과거는 과거가 아닌 것이 될까.”
미진 작가의 에세이 ‘집이라는 그리운 말’에서 읽은 구절이다. 집을 말하는 책들은 많지만 이 책은 단순히 집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한 사람의 성장소설 같다. 집에 얽힌 가족들의 단란한 이야기, 옛 동네에 남겨두고 온 추억들은 그녀의 것인데 덩달아 나도 그 동네에 살았던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던지며 제일 먼저 ‘엄마’를 부르는 내가 있다. 함께 어울려 다니며 동네를 누비고, 해가 지면 꼬질꼬질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서로의 집으로 들어가는 동무가 된다.
그 시절 우리의 엄마들이 누구나 그랬듯이, 그녀의 엄마도 내 집을 향한 소박한 꿈이 있었고, 허리띠를 졸라가며 그것을 이루어 나가는 삶을 살았다. 사랑하는 부모가 내 집 마련을 목표로 사는 동안 혹여나 허다한 즐거움을 놓쳤을까 봐 못내 마음 아파하는 미진 작가는 본인의 집을 장만한 뒤에 비로소 그녀 엄마의 마음을 만났다. 그녀는 자기만의 방에서 창문 가득 해를 받으며 행복해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엄마 아빠가 그 모습을 보며 잠시라도 행복했다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속삭인다. 아마 부모님은 충분하셨을 테니 이제 그만 마음 놓아도 된다고 엄마 아빠 대신 내가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다.
집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노동을 한 개인들이 서로의 육체를 아끼고 정신을 놓을 수 있는 곳, 해가 넘어가고 어둑해지면 돌아가고 싶은 곳, 지친 몸을 누일 수 있는 곳, 추워도 따뜻한 곳, 기쁘면서 슬프고 애달프면서 그리운 곳, ‘집’이라는 곳은 그렇다. 집과 똑같은 말로 정의 내릴 수 있는 존재가 또 있다. 바로 엄마다. 미진 작가에게 집은 곧 엄마다. 책을 덮는 순간 그녀가 그리워하는 것은 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게 단 한 번의 시간을 얼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엄마의 손길을 얼리고 싶다. 그리고 아주 힘든 어느 날 따뜻한 햇볕에 녹여 만지고 싶다. 그럼 그 기억을 가슴에 품고 남은 시간을 또 마냥 철없이 조금은 뻔뻔히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리움은 문신이다. 지우려 애써도 지워지지 않는다. 살 깊이 물들어 파낼 수가 없다.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사무쳐도 이제는 흘러가 닿을 곳이 없기에 그녀의 마음은 가끔씩 옛날에 살았던 만리동 고개며, 처음으로 집주인이 됐던 봉천동의 초콜릿색 대문 집이 있던 골목을 서성이는 게 아닐까? 거기에 가면 지나가는 딸을 보려고 골목 모퉁이에 몸을 숨겼던 엄마의 형형한 눈빛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김윤정(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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