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화살을 피하는 방법
[[휴심정] 법인스님의 대숲바람]
유월두류초색다 六月頭流草色多 - 유월 두류산 산색이 더없이 짙푸르구나
밝아오는 이른 아침, 무심한 눈으로 초록이 무성한 산을 바라봅니다. 은밀한 얼굴의 산색이 빛납니다. 무심한 귀를 열어 흐르는 물소리 듣습니다. 그 오묘한 음성이 가슴을 울립니다.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깨침이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관념에서 벗어난 내가 눈앞의 사물에 오롯이 집중합니다. ‘보이는 만물은 관세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미묘한 설법이다’라는 옛사람의 마음 세계도 어렴풋이 알아챌 것 같습니다.
산색과 물소리에 마음을 주니 문득, 헤르만 헤세 소설 <싯다르타>가 떠오릅니다. 주인공 싯타르타는 브라만 가문에서 많은 학문을 머리에 쌓고 신에게 올리는 기도 소리를 들으며 성장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그런 삶의 의미 없음과 공허함을 절감하고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고타마 붓다를 만나 그의 세계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붓다의 뒤를 따르지 않고, 붓다에게 귀의한 친구 고빈다와도 이별하고 다시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출가는 산속의 적정처가 아닌 세속이었습니다. 그는 장사로 많은 돈을 벌고 아름다운 여인 카밀라와 사랑을 나누며 살아갑니다. 싯다르타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나름대로 진리를 체험하는 듯했지만, 곧 그의 초심은 흔들리고 삶은 어김없이 피폐해져 갑니다.
결국 그는 또다시 세속을 떠나 자신의 세계를 찾아 출가합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뱃사공 바수데바를 만나 강가에 살면서 강물 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강물의 얼굴에서, 강물의 소리에서 우주 심연의 소리를 듣습니다. 오직 일하고, 먹고, 사랑하는 삶에 집중하라는 강물의 음성에서 삶의 진리를 깨칩니다. 마침내 싯다르타는 생각의 사슬에서 벗어나 삶의 심장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대가 추구해 온 사상에서 놓여나십시오. 그리고 사물에 집중하십시오. 오직 삶으로 들어가십시오.”
우리는 병을 얻어 몸이 아프기도 하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차별과 소외로 고통받기도 합니다. 허나, 삶의 불안, 삶의 의미 없음, 이보다 더한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살면서 찾아오는 우울, 강박, 권태, 의미 없음 등의 내적 불안과 고통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신체가 건강하고, 살림살이도 넉넉하고, 사회적 성공과 명성을 얻었다 해도, 내 마음이 평온하고 기쁘지 않다면 그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평온과 기쁨을 염원하며 끊임없이 길을 찾습니다.
평온과 기쁨이 있는 복된 삶을 원한다면, 먼저 불안과 의미 없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나는 왜 삶이 불안한지, 왜 나의 삶은 의미 없는 컨베이어 벨트에 매몰되어 가는지 잘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리고 평온하고, 깊고, 생동감이 넘치며, 매 순간이 살아 있는 감동의 삶은 어떻게 오는지 탐구해야 합니다. 이제 시선을 돌려보겠습니다. 오늘날 불자들의 스승 석가모니 붓다의 고뇌를 주목합니다. 출가 이전 그분의 청년 시절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높은 신분으로 주거, 교육, 문화생활 전반을 풍요롭게 누렸습니다. 그러나 청년 싯다르타는 늘 평온하고 기쁜 삶에 목말라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누리던 세상의 많은 것을 결연하게 포기하고 왕궁을 탈출했습니다. 그의 출가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경전에서는 그것을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요약합니다. 불안과 괴로움에서 벗어나 삶의 진정한 환희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는 6년 수행을 거쳐 마침내 깨닫고 붓다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붓다, 부처! 생명의 이치를 깨닫고 모든 고통의 족쇄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붓다는 인간이 겪고 있는 괴로움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최고의 의사입니다. 그래서 나는 붓다에게 ‘닥터 붓다’라는 별칭을 올립니다. 붓다는 삶의 괴로움을 조목조목 정리했습니다. 그것이 사고(四苦)와 팔고(八苦)입니다. 태어나서 늙어가고 병이 들어 죽는 생로병사는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존재론적 괴로움입니다.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은 35살 청년 붓다는 생로병사의 불안과 괴로움에서 해탈했다고 선언합니다. 닥터 붓다는 네 가지 괴로움을 더 말합니다. 삶의 일상에서 만나는 불안, 갈등, 괴로움입니다. 옮겨보겠습니다. 애별리고(愛別離苦)와 원증회고(怨憎會苦)가 있습니다. 관계의 어려움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괴로움, 또 피하고 싶은 것들도 만나야 하는 갈등과 어려움입니다. 사람들은 생로병사의 존재론적 불안보다 이러한 인간관계의 불화와 갈등에 더 괴로워합니다. 다음은 구부득고(求不得苦)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내 뜻대로 얻을 수 없는 어려움입니다. 마지막은 오음성고(五陰盛苦)입니다. 이것은 전문적인 해석이 필요하지만, 간명하게 정리하자면 몸과 마음, 감정과 욕구를 가지고 살면서 일상에서 만들어내는 온갖 괴로움입니다. 그래서 붓다는 ‘인생은 괴로움이다’라고 한 문장으로 선언합니다.
자, 이제 이 여덟 가지 괴로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나는 복이 많아서 중학교 3학년 때 붓다의 품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처음 경전을 만날 때는 당황했습니다. 인생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말씀이 곳곳에 너무 많았습니다. 또 모든 것이 무상하고 허망하다는 말이 매우 불편했습니다. 인생을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살라고 해야 하는데 왜 이리 온통 괴로움이라고 말하는가. 살면서 기쁜 일도 많은데 왜 인생은 괴로움이라고 세뇌시키는가. 그래서 한동안 불교가 현실 도피적인 염세주의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적잖은 사람들이 불교에 대해 이렇게도 판단합니다.
그러다가 붓다의 여러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을 바꿨습니다. 붓다의 진의는 이렇습니다. 삶이 불안하고 불완전하고 괴로우니 어서 거기서 벗어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닥터 붓다는 진단과 처방의 달인입니다. 너희들이 병으로 신음하고 있다면 치유 이전에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직시하라. 그리고 병이 발생한 원인과 조건을 냉정하게 탐구하라. 그런 다음 병이 발생한 원인을 제거하고 회복하려고 노력하라. 이러한 진단과 처방을 경전에서는 사성제와 팔정도로 교설하고 있습니다.
정직한 직시, 냉엄한 성찰, 용기 있는 결단만이 내 삶을 괴로움에서 기쁨으로 전환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직시와 성찰을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어두운 얼굴을 마주하고 인정하면 자기 정체성이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삶을 온갖 그럴듯한 변명의 포장지로 감추고 위장합니다. 실로 자기 삶이 통째로 왜곡과 허위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닥터 붓다는 해탈과 열반과 지복 즉, 삶의 평온과 기쁨을 추구하는 자는 먼저 자신을 잘 진단하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걸린 병을 모르거나 감추느라 진단하지 못한다면 길은 없습니다. 진단 없는 처방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묻지 않는 자에게 어찌 답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삶에서 우리는 어떤 불안과 괴로움을 만드는지 사고와 팔고를 바탕으로 살펴볼까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갈등과 불안과 괴로움은 분노와 자기주장, 삶의 도피로 표출됩니다. 원하는 만큼 얻지 못해서 화가 나고, 내 뜻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아서 화가 나고, 나를 알아주지 않아서 화가 나고, 늙어가니 화가 나고, 재미없어 화가 나고, 의미 없어 화가 나고, 이웃과 비교해 보니 화가 납니다. 그러면 누가 알아주고, 내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남보다 많이 누리고, 늙어가지 않으면 해결이 될까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할 때 그다음 길이 보입니다.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 초기 경전 말씀입니다. 첫 번째 화살은 누구나 맞습니다. 붓다도 예수도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붓다라고 생로병사를 피할 수 있었습니까? 붓다와 예수 당시 그분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시비 걸고, 욕하고, 거짓말로 왜곡하고, 모함하고, 배신했습니까? 심지어 예수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는 모함으로 정치범 누명을 쓰고 십자가의 수난까지 당했습니다. 이렇듯 첫 번째 화살은 누구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해탈과 구원은 사건을 외면하고 피하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사안에 따라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이미 내게 온 첫 번째 화살을 마음에 담거나 붙잡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석가모니 붓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습니다. 첫 번째 화살입니다. 붓다가 비난을 퍼붓는 그에게 화를 낸다면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것입니다. 붓다는 애써 화를 억누르려 하지도 않았고, 그를 경멸하는 마음을 없애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흔들림 없는 무심과 연민심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왜 나에게 대응하지 않느냐는 시비꾼에게 붓다는 말합니다. “나는 당신이 주는 욕의 진수성찬을 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남이 자신을 무시하고 알아주지 않아서 화가 나고 열등감이 생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가 평온과 기쁨을 얻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매번 남이 나를 칭찬해 주고 인정해 주면 해결될까요?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일까요? 그 답은 반야심경에 있습니다. ‘이무소득고 무유공포(以無所得故 無有恐怖)’, 무엇을 구하는 마음이 없으면 어떤 서운함과 불안이 생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정의 충족이 답이 아니라 인정을 구하는 마음, 인정을 받아서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생각과 의도가 부질없음을 알고 내려놓으라는 말입니다. 남의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는 의도 자체를 가지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가 첫 번째 화살도 불러오지 않는 인생의 고수입니다.
삶이 의미 없고 재미없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뭔가 자극적이고 새롭고 변화무쌍한 것들을 찾아 실컷 누리면, 의미 있고 재미있는 삶이 될까요? 경험한 바와 같이 그렇지 않습니다. 무수한 싫증과 권태와 자극의 악순환은 반복됩니다.
그렇다면 삶의 불안을 어떻게 해소할까요? 삶의 기쁨과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까요? 내 마음의 눈이 깊어지고, 마음의 귀가 무심히 열릴 때, 마주하는 산색과 물소리가 빛나고 명징해질 것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삶의 신비와 기적을 마주할 것입니다.
부디 첫 번째 화살이 날아오지 않게 하고, 피할 수 없는 첫 번째 화살이라면 침착하게 받으면서,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도록 주의 집중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이것이 일상의 수행입니다.
글 법인 스님/인드라망생명공동체 지리산 실상사 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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