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홍 칼럼] 6·25전쟁 정전 70주년에 생각한다

2023. 7. 3.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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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월 5일 오후 8시, 스탈린이 모스크바 크렘린궁 집무실에서 자신을 찾아온 김일성과 마주앉았다. 1948년 9월 북한 정권을 수립한 후 첫 면담이다. 이날 회동에는 북한 측에서 부수상 겸 외상 박헌영, 부수상 홍명희, 교육상 백남운, 모스크바 주재대사 주영하가 배석했다. 소련 측에서는 외무장관 비신스키와 평양 주재대사 스티코프가 배석했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남한에 미군 2만여명이 남아 있어서 북조선을 위협하고 있으니 소련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고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모든 전력 증강에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요청에 미국달러 4000만달러에 해당하는 2억루블의 차관도 약속했다.

이 면담록은 소련 붕괴 전후 러시아 군부의 개혁파 리더로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군사보좌관 드미트리 볼코고노프 대장이 1988년 저술한 ‘스탈린, 승리와 비극’에 구소련 붕괴 후 1992년 새로 발굴한 자료를 추가한 내용이다. 7·27 정전 70주년을 맞아 6·25전쟁에 대해 오늘날 한반도 주변 정세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을 돌아보게 하는 기록들이다.

전쟁 발발 3년1개월여 만에 유엔군, 북한 인민군, 중국 인민지원군의 사령관들이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볼코고노프가 발굴한 문서들 중 스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고한 전문들을 보면 6·25전쟁의 실질적 지휘자는 그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북한 주재 소련군사고문단이 작성해 하달한1950년 5월 ‘선제타격 작전계획’과 전쟁 개시 일주일 전 북한군 7개 사단에 내려보낸 6월 18일자 ‘전선정찰명령 제1호’는 모두 스탈린에게 보고된 문서들이다.

6·25전쟁의 개전에 대한 김일성 자신의 언급은 거의 유일한 기록이 1966년 3월 11~21일 평양을 방문한 일본 공산당 간부 7명과 가진 대화 내용이다. 김일성은 6·25전쟁 개전에 대해 후회하는 말들을 내놓았다.

6.25 발발 일주일 전인 1950년 6월 18일 북한인민군 7개 사단 등에 하달된 ‘전선정찰명령 제1호’의 러시아어 원본으로 북한 주재 소련군사고문단이 작성한 것이다. [필자 제공]

그는 “북조선 노동당 내부에 소련파와 중국에 기대는 연안파가 많아 이들의 압력에 의해 조선 전쟁에 돌입하게 됐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 같다”고 했다. 1978년 도쿄 사상운동연구소가 출판한 ‘일본공산당 대사전’에 담겨 있는 대목이다. 그는 또 1950년 5월 선양에서 북한, 소련, 중국 등 3국 공산당이 고위급 회담을 갖고 대남 선제공격방안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이 회담에서 소련은 무기와 군수물자를 공급하고 중국은 직접 군대를 파견한다는 역할 분담이 정해졌었다고 밝혔다. 그는 또 무기 공급 등은 물론 유상 원조로 비싸게 지불했다면서 “조선 전쟁에서 이득을 본 것은 소련뿐이며 조선과 중국의 희생으로 극동지역에 팽배하던 미국 세력을 한때 저지할 수 있었다”고 했다. 스탈린과 김일성이 스티코프를 통해 주고받은 전문을 보면 김일성은 1950년에 정제철광 1500t과 은 40t 그리고 무기와 군수물자들을 받는 대가로 엄청난 양의 금을 보내기로 통보했다.

6·25전쟁의 휴전 논의는 유엔군의 1950년 9·28인천상륙작전과 10월 15일 중국군 참전 그리고 1951년 유엔군의 1·4후퇴 등 어느 쪽도 일방적 승리를 굳힐 수 없는 상황에서 본격화된다. 유엔군의 화력이 우세했지만 사령관 맥아더가 북한과 중국 인민군 특성에 어두워 작전 미스를 범했다는 것이 미국 육군성 전략가들의 평가였다. 맥아더는 전통적 작전 이론을 중시했으나 공산군은 치고 빠지는 식의 변화무쌍한 산악게릴라전을 구사했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장 큰 오류는 유엔군이 동쪽과 서쪽의 군사도로를 따라 북상한 점이었다. 중국군이 투입되기 전부터 이미 북한 최현의 2군단이 산악을 타고 남하하면서 도로를 따라 북상한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때 중국군이 투입돼 유엔군의 앞머리를 치고 북한군이 뒤에서 공격하는 바람에 포위 섬멸당할 위기에까지 몰렸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미 육군성 전략가들은 치욕스러운 ‘인디언 태형’을 당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인디언들이 두 줄로 늘어서서 그사이로 죄인을 지나가게 해놓고 양쪽에서 걷어차는 형벌을 가하는 것에 비유한 지적이다.

1·4후퇴 직후인 1951년 1월 13일 유엔 안보리는 현상태에서의 휴전안을 6대 5로 통과시켰으나 중국에 의해 거부당했다. 당시는 공산군이 서울을 다시 손에 넣는 등 승승장구했고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과 안성을 잇는 37도선까지 퇴각해 있을 때여서 이 휴전안이 성립됐다면 한반도 지도는 크게 달라질 뻔했다. 그러나 미국의 전쟁목표는 공산군을 38선 이북으로 밀어내는 전전(戰前) 상태의 회복이었다. 세계2차대전 종전 당시 미국과 소련이 분할 점령한 한반도의 분단선을 지키는 것으로 열강 간에 합의된 국제질서를 힘에 의해 변경시키려는 기도를 저지하는 목표였다.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고 북상할 때도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그 이상 진군하지 말고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군에 대한 문민 통제를 벗어나는 것으로 보인 맥아더는 1951년 4월 해임됐고 1953년 7월 당시 상태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결국 38선에 준하는 분단선이 결정됐으며 그후 세계 역사상 가장 긴 휴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미디어대학원대 석좌교수·전 서울디지털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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