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 잇는 블루스 매력에 흠뻑 젖은 노들섬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한국 블루스의 ‘산증인’ 신촌블루스의 엄인호, 한국 최고의 블루스 기타리스트 김목경, ‘기타리스트의 기타리스트’로 불리는 숨은 고수 기타리스트 이경천이 한 무대에 오른 것이다. 세 거장은 에릭 클랩턴의 ‘아이 샷 더 셰리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셋이서 묵직하면서도 현란한 기타 솔로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목은 고수들이 일합을 겨루는 대결이 아니라 각자 살아온 세월을 기타로 풀어내 나누는 대화였다. 2일 서울 한강 노들섬 라이브하우스에서 펼쳐진 ‘2023 서울국제블루스페스티벌’ 마지막 날 무대는 기타들의 대화로 무르익었다.
6월30일~7월2일 사흘간 열린 서울국제블루스페스티벌이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한국블루스소사이어티와 한겨레신문사 공동 주최로 열린 블루스 축제다. 한국블루스소사이어티는 블루스의 본고장인 미국 멤피스에 있는 ‘블루스 파운데이션’의 한국 지부다. 한국에 비교적 생소한 블루스 문화를 선도하는 동시에 한국 블루스의 세계화를 추진하고자 2018년부터 매년 블루스 축제를 열어왔다.
축제 첫날에는 ‘리치맨과 멤피스 친구들’이란 주제로 흥겨운 무대가 펼쳐졌다. 멤피스에서 열리는 세계블루스대회에 참가했던 젊은 블루스 연주자들이 총출동했다. 지난해와 올해 대회에서 각각 본선까지 진출한 리치맨과 그루브나이스, 마인드바디앤소울을 비롯해 하헌진, 김헌 앤 범블 블루 등이 무대에 올라 한국 블루스의 내일을 밝혔다. 시카고 블루스 명인 크로스도 기타리스트 정재호와 함께 무대를 달궜다. 젊은 관객들이 주를 이룬 공연장은 흥이 넘실대는 블루스 클럽으로 변신했다.
둘째 날에는 ‘최항석의 기타 히어로들’ 무대가 펼쳐졌다. 새롭게 한국 블루스 대표 밴드로 떠오른 ‘최항석과 부기몬스터’의 최항석이 여러 분야 최고의 기타리스트를 초대해 함께 블루스를 즐겼다. 한국 유일의 시가박스 기타 연주자 김대승은 “가난한 흑인 노예 집안에서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네모난 시가 담배 상자로 만들어준 기타에서 유래한 시가박스 기타는 원초적인 사운드를 내기 때문에 블루스와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그는 줄이 4개 또는 3개뿐인 시가박스 기타로 날것의 냄새 물씬한 연주를 들려줬다. 중간중간 애국가와 아리랑 선율도 들렸다.
퓨전재즈 밴드 에이퍼즈의 기타리스트 지니킴, 한국 최고의 집시 기타리스트 박주원도 무대에 올라 최항석과 함께 블루스에 녹아들었다. 1920년대 초창기 델타 블루스의 대가 펠릭스 슬림은 객석을 돌며 노래해 분위기를 달궜다. 블루스록 밴드 ‘로다운 30’ 리더이자 한국블루스소사이어티 사무총장인 윤병주는 “블루스 장르 페스티벌을 이렇게 계속해 올 수 있을지 처음에는 몰랐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없어질 뻔한 위기를 넘기고 오늘에 왔다. 앞으로 10회, 20회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이날 객석에는 10대부터 중장년까지 다양한 연령대 관객들이 자리했다. 특히 한림연예예술고등학교 학생 10여명이 교사와 함께 단체로 와서 눈길을 끌었다. 최항석은 공연 도중 한림예고 학생 기타리스트 2명을 무대에 올려 함께 즉흥연주를 펼치기도 했다. 무대에서 연주를 마친 박진서(한림예고 1학년)군은 “떨려서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했지만,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고 말했다.
마지막 날에는 ‘신촌블루스 앤 프렌즈’라는 주제로 신촌블루스 엄인호, 김목경, 이경천 등 연륜 있는 거장들의 무대가 펼쳐진 만큼 관객들의 연령대도 올라갔다. 한영애, 김현식, 이은미, 정경화, 강허달림 등이 거쳐 간 신촌블루스의 보컬 자리는 제니스·강성희·김상우가 채웠다. 김상우는 김현식 추모곡으로 고인이 신촌블루스 3집에서 불렀던 ‘이별의 종착역’을 부르기도 했다. 결성 15주년을 맞은 솔·블루스 밴드 소울트레인은 탄탄한 내공의 라이브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축제의 대미를 장식한 노래는 신촌블루스의 ‘아쉬움’과 ‘골목길’이었다. 1집 대표곡 ‘아쉬움’은 엄인호가 저음으로 읊조리듯 불러 색다른 느낌을 줬다. 김현식이 불렀던 2집 대표곡 ‘골목길’은 엄인호의 나지막한 읊조림과 제니스의 끈적하면서도 파워풀한 보컬로 재해석됐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블루스의 매력에 푹 빠진 관객들은 무대가 끝나고도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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