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석·박성수 부부 화가 유라시아 횡단 자동차 미술여행-6]
[유라시아=뉴시스] 윤종석·박성수 부부화가 = 6월 6일 드디어 모스크바에 입성, 그날도 캠핑장 푸른 숲에서 모스크바의 밤을 보내고 오랜만에 깊은 잠을 청했다. 새소리에 아침을 여는 호강을 누리며 모스크바의 중심 ‘붉은 광장’으로 향했다. 누군가 모스크바에 오면 이전에 만났던 러시아의 모든 도시는 잊게 될 것이라 했다는데, 정말 그전에 만났던 러시아 도시들과는 너무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럽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우뚝 선 붉은 건물들과 바람에 흔들리는 러시아 국기들. 거리를 채운 사람들과 광장에 길게 뻗은 러시아 크렘린궁. 크렘린은 러시아어로 ‘성벽, 성채’를 의미하는데, 러시아의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상징적인 존재감이다. 레닌 무덤과 그곳을 향해 길게 줄을 선 인파들, 여행객들을 위한 관광 가이드들, 여기가 과연 전쟁 중인 나라가 맞나 싶어 놀라웠다.
물론 지하철역과 뮤지엄, 백화점 등에선 가방과 소지품 엑스레이 검사를 통과해야 하고, 거리에선 경찰과 군인들의 날 선 표정들을 볼 수 있었다. 반면 거리의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의 표정이 대조적이다. 거리의 아이스크림 가게들, ‘돌로 된 꽃’이라는 찬사를 받는 성 바실리 대성당에 들어가려는 끝없는 행렬에 이전의 다른 도시들과 시골 마을들을 떠올리니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그 마음을 뒤로 하고 러시아의 4대 미술관 중 2곳이 모스크바에 있다니 급한 마음에 발길을 옮겼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유명 미술관 4곳은 모스크바의 트레티야코프미술관(Tretyakov Gallery)과 푸시킨미술관(pushkin museum),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시미술관(Hermitage museum)과 러시아미술관( Russian museum)이다. 우리는 제일 먼저 트레티야코프미술관을 찾았다. 러시아 미술의 보물창고라고 불리며, 18세기 이후 러시아 미술품들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트레티야코프미술관은 러시아 역사가 시작되는 시기부터 1900년대 초반의 러시아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우선 이 미술관의 어마어마한 작품 수량에 놀랐고, 작품들을 관람하는 수많은 러시아 사람들의 관심과 열기에 다시 한번 놀랐다. 미술관은 여러 개 방으로 나누어져 시대별로 대표적인 화가들의 작품을 관람하기가 매우 수월했다. 특히 자국의 미술품을 가장 효과적으로 관람할 수 있도록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어, 그 동선에 따라 관람을 이어가니 러시아 미술을 이해하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작품 관람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섬세한 관람 규칙이 안내되어 있고, 한국어로 작품설명을 들을 수 있는 오디오 서비스도 마련되어 인상적이었다.
또한 고급스러운 파스텔 톤의 벽면에 세련되게 자리 잡은 고전미술 작품들이라니, 간만에 예술의 품에서 영혼이 따뜻해지는 위안과 흥분감을 맛보았다. 우리는 현대미술을 전공한 예술가지만 아주 오래된 고전미술도 사랑한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어쩌면 고전미술이 지루할 것이란 선입견도 있겠지만, 고전미술 작품 안에 흐르는 서사를 상상하며 작품들을 읽어가다 보면 내재한 재미는 지금 우리의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안다.
오랫동안 미술관을 배부르게 보고 나오는 길이 못내 아쉬워 미술관 앞 노천카페에 들러 윤 작가랑 모스크바 생맥주 한 잔씩 갈증까지 채우니,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모스크바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햇살이 뜨겁더라도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갑자기 추위가 느껴진다. 드높은 파란 하늘에 그림에나 나올 법한 흰 구름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다가도, 거대한 먹구름이 갑작스럽게 뒤덮어 굵은 소나기를 뿌리기도 한다. 정말이지 지금의 러시아처럼 속내를 알 수가 없다. 우산 하나 가방에 넣고 다시 모스크바의 또 다른 대표 뮤지엄 푸시킨미술관을 찾았다.
푸시킨국립박물관은 고대부터 르네상스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이다. 특히 19세기와 20세기 미술품은 주로 19세기말 유명한 러시아 컬렉터인 슈킨과 모로조프가 모아놓은 작품들이 큰 인기다. 두 사람은 인상주의를 비롯하여 다양한 현대미술 작품들을 컬렉션 했을 뿐 아니라, 당대의 젊은 러시아 작가들에게 컬렉션을 보여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다. 변변한 사진도 TV나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두 컬렉터 역할 덕분에 러시아의 아방가르드 미술이 꽃을 피우게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미술관은 개관 초기엔 모스크바 대학의 소장품을 전시하기 위한 부속 건물의 역할이었지만, 1912년 개관 후 1934년 새롭게 재단장을 마쳤는데 때마침 푸시킨 사후 100년이 되던 해였기 때문에 이를 기린다는 의미로 미술관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현재 미술관의 소장품은 약 70만 점에 이른다고 전해진다. 그중에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그림이 많이 소장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폴 세잔, 에드가 드가, 르누아르, 모네, 고갱, 고흐, 툴루즈 로트렉 등 인상주의 대표 화가들의 작품을 비롯해 마티스, 피카소 등 거장의 작품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그렇게 여기 푸시킨미술관에서는 수많은 유럽 미술사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었는데, 전시 동선의 흐름에 따라 그림을 보던 중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순간을 맞았다. 정말 심장이 그랬다. 마르크 샤갈! 그의 그림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그의 전시를 볼 수 있었지만, 샤갈의 고향, 이곳 러시아의 샤갈 작품은 뭔가 특별해 보였다. 샤갈이 가지고 있는 초현실적 로맨틱 서사를 느끼는 순간이 나는 너무 행복했다. 이런 순간이 바로 미술기행의 보람이 아닐까 싶다.
다음날도 모스크바의 미술관 투어는 계속됐다. 모스크바는 역시 모스크바다. 정말이지 모스크바의 하루하루는 온통 걷고 보고 걷고 보았다. 이날 들른 모스크바현대미술관(Moscow Museum of Modern Art)에도 18세기부터 20세기의 많은 작품이 모여있었다. 반고흐, 고갱, 세잔, 피카소, 르느와르, 루소 등 아름다운 원화들을 또 한 번 더 볼 수 있었다. 이전에 만난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두 미술관에 비해 공간의 규모는 다소 작았지만, 역시 많은 작품은 전혀 뒤지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시장에 빼곡하게 들어선 러시아 관람객들의 예술에 대한 깊은 관심과 반응들이었다. 공간에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채운 모습이 작품 못지않은 감동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러시아에 대한 인상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문화의 힘은 이념이나 정치를 경계를 충분히 넘어설 수 있음을 실감한다. 많이 보고 즐거이 하루를 보낸 날은 온몸이 쑤시고 다리가 아프다. 즐거울수록 아프다. 6월 13일, 좋았던 모스크바를 뒤로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향해 출발했다. 모스크바에 있을 때 캠핑장을 이용한 차박이 좋았기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도 캠핑장으로 향했다.
하루 안에 가기는 쉽지 않아 13일 저녁은 200km 앞두고 트럭가페에서 자고 14일 도착했다. 러시아의 마지막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유럽과 더 가까이 위치한 탓인지 더 유럽 느낌이 물씬 나는 거대하고 긴 건물들을 볼 수 있었다. 큰 강이 도시를 가로질러 많은 다양한 유람선들도 보이고 캠핑장으로 향하는 길에 에르미타주미술관이 보이자 벌써 가슴이 두근거렸다.
모스크바의 짓궂은 날씨로 심한 몸살감기에 걸려 고생을 한 뒤라 피곤했지만, 캠핑장에 차를 세우고 오후 6시쯤 다시 버스를 타고 도시 중앙으로 나갔다. 유람선을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가볍게 돌고 싶었다. 샴페인과 와인 잔도 챙겼다. 바람은 다행히 따뜻했고, 밤 11시에도 밝은 백야의 러시아를 즐기기에 정말 좋은 유람선 투어, 그 투어를 가기 전 거리에서 흥정이 필수다. 1000루블로 시작해 800루블로 당첨! 내가 타고 싶은 유람선도 고를 수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람선은 큰 강을 가로질러 큰 다리 밑을 통과하며 도시를 돌기도 하지만, 아주 작은 다리와 작은 강이 연결된 곳도 가보기 위해선 너무 크지 않은 유람선을 골라야 한다. 우리는 배에 올라타 러시아 연인들과 가족들 틈에 앉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지금 봄이 한창이라 꽃가루가 날려 기관지에 문제가 생긴 나에게 힘들었지만, 달콤한 샴페인 덕분인지 기분은 좋아졌다.
다음날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이고, 소장품이 300만 점에 달하는 에르미타시미술관의 신관과 구관도 둘러보고, 다른 현대미술관 한 곳도 찾아보았다. 에르미타시미술관은 ‘러시아의 겨울궁전’이라 불리며 초록색으로 아름답고 거대한 구관과 바로 맞은편 큰 광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거대한 신관으로 이뤄졌다. 구관에는 고대 이집트 유물부터 그리스 로마, 르네상스 바로크 인상주의를 거쳐 소련 시절의 예술품까지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다. 소장품이 점차 늘어나면서 새로 생긴 신관에는 마티스, 피카소 등 현대미술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거대한 두 미술관을 맘먹고 돌아보려면 며칠이 걸릴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우리는 이 거대한 미술관을 여건상 하이라이트 위주로 둘러보고,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현대미술관인 에르라타(ERARTA))로 향했다. 현시대의 아티스트로 살아오면서 현대미술에 대한 궁금증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에르라타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사립미술관으로 동시대 예술가들의 다양한 예술 트렌드를 중심으로 기획하고 전시하는 공간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다양한 러시아 현대미술을 만나고 느낄 수 있었다. 여러 공감대와 생경함이 동시에 오갔다.
아쉬웠지만, 이제 러시아를 떠날 때가 오고야 말았다. 뭔가 다 느끼지 못했을 것 같이 무거운 마음이 들었지만, 아직 남아있는 몹쓸 감기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처럼 나를 북유럽의 발트 3국 중 최북단 국가인 에스토니아로 데려가고 싶었다.
다시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다. 에스토니아의 북동부 끝 소도시 나르바 국경 검문소(border checkpoint)를 구글로 찍고 출발했다.
러시아는 빠져나올 때 많은 GPS 장애를 겪어 빙글빙글 돌린다 해서 도로명을 숙지하고 무조건 그 도로와 비행장 표시를 따라 나오면 어느 정도 수월하게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 와중에도 무료도로로 나올 수 있도록 1차 설정해 놓고 출발했다. 육로로 국경을 넘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니 가슴이 뛰었다. 에스토니아는 지금 러시아의 전쟁에 비우호적이며, 이미 라트비아의 국경은 넘기가 매우 까다롭거나 거절당한 경우가 생기는 상황에서 에스토니아 마저 국경 폐쇄 가능성이 제기되던 상황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총영사관에 연락 해 안전 여부를 전해 듣고 긴장감 속 출발했다. 2시간 30분쯤을 쉬지 않고 달려 러시아 국경 초소에 다다랐다. 러시아 군인으로 보이는 이가 다가와 여권과 운전면허증, 차량 영문등록증을 확인한 후 번호표를 주더니, 검문을 위해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알려줬다. 그곳에서 다시 여권과 차량 등록증을 확인한 후 러시아 차량 입국증에 출국 도장을 찍어준 뒤 칠공이의 외부와 내부에 대해 검사했다. 별다른 이상이 없자 무사히 통과되었다.
에스토니아 국경 검문소에서는 그린카드, 즉 유럽 자동차보험을 들어야 하는데 우리는 일단 EEA(유럽경제지역) 국가에서 가능한 3개월 보험을 들었다. 에스토니아의 국경 나르바성은 러시아 국경의 성과 강이 흐르는 작은 다리를 사이에 두고 있다. 그 작은 다리를 건너니 정말 러시아를 두고 에스토니아로 오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 한순간에 너무도 쉽게 되어버린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바로 유라시아 횡단!그 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러시아 국경을 빠져나와 우리는 에스토니아의 탈린(Tallinn)으로 다시 향했는데, 유네스코에 등재된 중세 시대 구시가지로 유명한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는 핀란드 헬싱키로 가는 배를 탈 수 있는 항구가 있다. 우린 곧 핀란드 헬싱키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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