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자기부정은 혁신의 원천…‘이건희 경영’은 ‘위임’의 힘”
기술 선점이 미래 주도 지름길…“선도기업 장점 찾아야”
“잡스와 머스크는 기술에 미친 사람들… ‘손바닥’과 ‘길바닥’ 모바일 개척자”
“미래 리더, 도전하고 실패도 용인할 수 있어야”
얼마 전 경영 신간을 찾다가 두 눈을 의심하는 일이 있었다. 낯설어야 당연할 책 사이에서 익숙한 이름의 한 권이 불쑥 튀어나와서다. ‘황의 법칙’.
‘반도체 황창규? 20여년 전의 황의 법칙이 지금 신간으로?’ 잘못 봤나 싶어 책을 펼쳤다. 웬일인가, 그가 맞다. 하지만 생각했던 책은 아니었다. 반도체 설파가 아닌 젊은 리더를 향한 당부의 메시지였다. 삼성전자 기술총괄 사장을 지내고 2020년 KT 대표이사 회장에서 물러난 이후 후배 세대를 위한 재능기부 형태로 진행한 대학 강의 내용을 토대로 젊은 리더에게 전하고 싶은 본인의 경험과 조언을 담고 있었다.
세계 최고와 최초 기술의 반도체를 만든 장본인이자 5G 이동통신 기술을 이끈 황창규 전 회장은 미래 주역들에게 무엇을 당부하고 어떤 조언을 하고 싶었을까? 못다 했을 뒷이야기까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와 만남은 사흘 만에 이뤄졌다.
◇위기, 그리고 도전
-도전이란 무엇인가?
“반도체 밖의 ‘황의 법칙’에선 ‘도전하고 성취하는 삶’을 이야기하려 했다. 도전은 혁신이고, 혁신의 핵심이 곧 도전이다. 도전은 또 하나의 창의적인 것을 만들어 내는 모멘텀이다. 위기가 찾아와도 항상 가능성은 있다. 그걸 찾는 것이 도전이다. 지금까지 평생 도전하고 성취하는 삶을 살아왔다. 지금 상황이 만족스럽고 좋다고 현실에 안주해선 안 된다는 것을 셀 수 없이 느꼈다. 그런 경각심을 다음 세대에 알려주고 싶다. 스스로 알아가면 가장 좋겠지만, 앞선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겠나.
중요한 건, 도전이 반드시 성공과 성취를 해야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도전이란 자체만으로 가치 있는 메시지다.
위험 없는 기회는 없다. 오늘의 리스크를 감당해야 성공이든 실패든 내일의 결과를 알 수 있다. 오늘 움직이지 않으면 내일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리스크는 어떻게 오나? 위험을 예견할 수 있는 징조가 있나?
“삶 자체를 도전으로 생각해야 한다. 도전하는 이들에겐 리스크가 줄어든다. 준비하고 도전하지 않으면 리스크는 더 커진다. 기말고사가 코앞인 학생이 시험공부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나. 우리가 이미 경험으로 다 알고 있다.
위기를 예견하는 여러 기준이 있겠지만, 내가 위기를 알아보는 또 하나의 기준이 있다. 내부 조직원들이 소통을 잘하고 있는지, 또 비전을 갖고 뛰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면 내부에서도 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 리더가 조직을 챙기고 현장을 떠날 수 없는 이유기도 하다.”
◇파괴적 혁신
-(기업의) 혁신은 어디서 나오나?
“답은 고객과 시장에 있다. 시장과 고객의 관점이 전부다. 시장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고, 어떤 서비스로 고객을 만족시킬지를 파악하면 기업은 무엇을 해야 하고 뭘 혁신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기술 개발도 고객 중심이어야 한다. 소비자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과한 기술의 고도화를 꾀하지 말고 비록 기술적 혁신이 대단하지 않더라도 소비자가 원하는 기술을 제시해야 한다. 다른 말로 ‘파괴적 혁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파괴적 혁신은 절실함을 조건으로 한다. 피부로 절실하게 느낄 때 비로소 과감한 도전이 나온다. 긴 안목의 연구와 투자도 필요하다. 삼성전자가 플래시메모리로 20년 넘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파괴적 혁신은 자기 부정에서 시작한다. 트렌드를 알고 대세를 이끄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하는 데서 더 큰 혁신을 찾을 수도 있다. 가솔린 자동차를 부정해 봐야 전기차가 보이고, PC를 부정해 봐야 모바일 시장이 보이는 것도 그런 이치다. 모바일 시장이 주도하는 플래시메모리 시장이 커지리라 본 것도 PC 시장의 핵심인 중앙처리장치(CPU)를 부정한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한국의 기업들이 조선, 석유화학, 반도체 중심의 산업에서 벗어나 전기차, 방산, 배터리 등 미래 산업 분야에서 자리를 다져가는 것은 기업을 넘어 국가적으로도 긍정적인 혁신이다. 다만 처음부터 내수가 아닌 세계 시장을 타깃으로 해야 한다는 걸 당부하고 싶다. 그래야 글로벌 시장을 주도할 수 있다.
피터 드러커는 ‘변화의 가장 큰 위협은 바로 어제의 이론’이라고 했다. 이 말을 조금 바꾸면 ‘혁신의 가장 큰 위협은 바로 어제의 이론’이 될 수 있다. 어제까지 맞았다 하더라도 오늘은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 혁신이다. 혁신을 주도하면 리더가 된다. 혁신을 받아들이면 생존자가 되지만 혁신을 거부하면 죽음을 맞는다.”
-애플과 삼성은 어떻게 다른가?
“나라별 특성이 기업에서도 드러난다. 문화가 다르니 사고와 조직, 시스템이 다를 수밖에 없다. 가장 큰 차이라면 애플은 소프트웨어적 성향이 강하고 사용자 인터페이스(UI)를 강조하는 기업인 데 비해 삼성은 제조에 강한 기업이란 점이다. 최근에 보면 애플이 삼성을 따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요즘 애플에 혁신이 잘 안 보이는 것 같다.”
-미래는 어떻게 준비하나?
“기술 선점이 미래를 주도하는 지름길이다. 기술을 선점하면 경제적 이윤뿐 아니라 기업과 국가의 위상을 끌어올리고 미래 주도권도 갖게 된다. 퍼스트 무버(first mover), 즉 선도 기업이 되려면 대량 생산을 위한 인프라를 갖추고 이윤을 내기까지 투자 부담을 감당해야 하지만, 후발 주자로 따라가는 것 이상으로 얻는 것이 많다. 특허와 표준화 등으로 대표되는 기술적 리더십을 가지면서 경쟁 우위에 서게 된다. 후발 기업들이 넘보기 힘든 강력한 진입 장벽을 치는 것이다.
앞을 내다보는 투자도 그렇다. 기업이나 개인이나 돈이 있어야 투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서가려면 남들과 달라야 하고 미리 준비해야 한다. 시장이 얼어붙었을 때 미래를 보고 투자할 수 있는 건 남다른 경영 철학이나 눈높이를 갖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한국의 기업이 세계 최초와 세계 최고의 반도체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어려웠던 시기에 과감히 내린 결정 덕분이다.
모든 인류에게 공평한 것은 시간뿐이다. 실력과 능력, 그리고 천재성까지도 예측하고 준비하고 실현하는 자만이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리더의 자격
-우리는 어떤 리더를 원하는가?
“기업이 클수록 리더는 조직원들과 소통을 잘해야 한다. 마음이 열리면 들을 준비가 되고 행동할 준비가 된다. 조직 혁신의 첫걸음이 소통이다. 또 회사가 가진 비전을 직원들과 공유해야 한다. 비전은 조직의 불안을 해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비전의 효용과 가치는 힘들고 어려울 때 더 빛을 발한다.
내가 경험한 고 이건희 회장의 경영 알고리즘도 있다. ‘위임→경청→숙고→결단’으로 요약된다. 그의 결정은 믿을 만한 사람에게 일을 전적으로 위임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많이 묻고 많이 듣는다. 앞을 예측하는 데이터와 근거가 여기서 쌓인다. 그리고 혼자만의 숙고 시간을 갖는다. 결정은 리더 혼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빠른 결단을 내림으로써 최종 결정이 내려진다. 나와 기업이 더 큰 성장을 하려면 위임할 수 있어야 한다. 그에게 배운 최고의 경영 철학이 바로 ‘위임’이다.
때론 실패도 허용하는 리더가 돼야 한다. 한국의 기업 문화에선 쉽지 않은 게 현실이나, 실패도 용인할 수 있는 ‘포용’의 문화가 이젠 열려야 한다. 겁 없는 도전을 가능케 하는 것도 리더의 덕목이다. 포용하지 않으면 혁신도 없다.”
-직접 만난 스티브 잡스와 일론 머스크는 어떤 사람이었나?
“모두 기술에 미친 사람들이었다. ‘기술에 미치면 끝없이 도전하는구나’라는 확신을 준 것도 잡스와 머스크였다.
둘은 또 각자의 영역에서 모바일의 시대를 주도한 아이콘이다. 잡스는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핸드 모바일’을 열었고, 머스크는 자율주행 기술로 ‘로드 모바일’의 시대를 개척하고 있다.
잡스는 미래에 대한 열정이 불같았다. 삼성과의 협상과 계약에서도 끊임없이 질문하며 상대(나)를 압박하는 카리스마가 남달랐다. 그런 잡스를 ‘달래가며’ 애플의 미래를 열어준 (아이폰의) 기술에 우리의 플래시메모리 기술을 심었다. 우리 기업과 함께 모바일 시대를 열고 앞당긴 사람이다.
머스크는 잡스보다 스케일이 더 크다고 느꼈다. 그가 던지는 화두가 거칠긴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가능케 하리란 생각이 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또 다른 법칙과 도전
-‘제2의 황의 법칙’이 있다면?
“반도체 용량이 해마다 두 배씩 는다는 황의 법칙을 알린 게 2002년이다. 20년도 더 된 당시로선 파격적인 모바일 시대의 도래를 예견한 ‘메모리 신성장론’인 셈이었다. 이젠 데이터가 모든 영역에서 급속도로 성장 중이다. 지금 내가 기술적이고 물리적인 법칙을 내놓을 수는 없지만 그런 법칙이 있다면 그건 ‘데이터 신성장론’과 관련됐을 거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인공지능(AI)과 같은 기술이 급성장하면서 데이터 성장은 더 폭발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 이미 5G를 넘어 6G 기술을 말하고 있다. 지금의 속도를 상상 이상으로 뛰어넘는 데이터 성장이 일어날 것이다.”
-어떤 도전이 남았나?
“후배 세대와 젊은 리더의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게 선배로서 도전하고 일궈낸 소중한 경험을 남겨주고 공유하고 싶다. ‘세계 1등’이란 경험이 있다는 것은 개인과 기업의 도전에 힘이 된다. 앞선 세대의 도전과 성공의 과정을 알지 못하고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면 다른 폭발적인 혁신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본다.
보고 배우고 기억할 선배나 선각자가 있다는 것은 복이다. 내겐 미국 실리콘밸리 탄생의 주역이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반도체의 아버지’ 윌리엄 쇼클리(1910~1989) 박사와 인텔의 최장수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앤드 그로브(1936~2016)가 있었다. 오늘의 내가 있게 해준 선각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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