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임의 초록목록] 여름에 피는 원추리, 꽃말은 기다리는 마음
백운산원추리는 한반도 전역에 저절로 자라
밤에 자외선 되쏘아 곤충 유혹하는 원추리 종도 있어
편집자주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이 격주 월요일 풀과 나무 이야기를 씁니다. 이 땅의 사라져 가는 식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허 연구원의 초록(草錄)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시름을 잊게 해주는 꽃이라 하여 ‘망우초(忘憂草)’라 불렀다. 꽃을 차고 다니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때로는 ‘의남초(宜男草)’라고도 했다. 어린잎을 삶아 나물로 먹을 때는 ‘넘나물’이다. 뿌리는 ‘녹총(鹿葱)’이라는 약재로 여러 한방서에도 등장한다. 그 꽃, 원추리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꽃으로, 밥으로, 약으로 심어 기른 역사가 하도 깊어서 당연히 우리 식물 같지만 원추리(Hemerocallis fulva)는 중국 원산의 재배식물이다. 656년 당나라 때 나온 약물학서에 원추리에 대한 첫 기록이 있다. 1059년 송나라 때 나온 책에서는 구체적인 복용법도 제시한다. 뿌리를 생강이랑 같이 갈아 마시면 오장을 튼튼하게 한다는 설명. 1570년대 영국에서 활동한 식물분류학자 로벨의 기록을 근거로 원추리가 유럽에 도입된 건 16세기 무렵으로 본다. 서로 다른 두 종을 교배시켜 얻은 새로운 원예 품종은 1892년 영국에서 처음 나왔다.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개량종이 급격하게 불었다. ‘미국원추리원예협회’에 등록된 원예종 수가 지금은 5만 개가 넘는다. 국내 꽃시장에도 마음만 먹으면 취향에 따라 골라 살 수도 있다.
식물 탐사하느라 이 산 저 산으로 다니는 내가 실제로 가장 자주 보는 건 민가에서 심어 기르는 중국 원산의 원추리가 아니다. 최근 만들어진 그 원예 품종들은 더더욱 아니다.
1934년 8월 22일 지리산 북쪽의 백운산에서 일본의 식물학자 나카이는 새로운 원추리 한 종을 만난다. 다른 나라의 여러 원추리와 견주어 본 후 1943년 마침내 그 식물을 Hemerocallis hakuunensis라는 신종으로 발표한다. 처음 발견한 장소의 지명을 따서 붙인 그 원추리의 우리 이름은 백운산원추리다. 함양과 남원의 경계에 있는 그 높은 산이 아니어도 한반도 거의 전역의 숲과 들에 저절로 자란다. 여름에 현장에서 기록한 식물조사 야장(野帳)에, 또는 채집한 식물표본에 백운산원추리가 없으면 '어라, 조사 제대로 안 했나?' 싶을 정도다.
원추리속의 학명은 낮이라는 뜻의 ‘hemera’와 아름다움이라는 의미의 ‘callos’를 합친 말이다. 낮에 피는 꽃, 먼동이 터서 해가 지기 전까지 핀다는 뜻으로, 영어로는 데이릴리(day-lily)다. 하지만 밤에 피는 원추리 종류도 있다. 식물분류학자들은 원추리속 식물을 16종 정도로 본다. 그들 혈통은 크게 둘로 나뉜다. 낮에 피는 그룹과 밤에 피는 그룹. 밤보다 낮에 개화하는 종이 적어도 네 배는 더 많다. 자생하는 백운산원추리나 옛날부터 키운 원추리가 그렇다. 호랑나비와 제비나비처럼 꽃가루받이를 해주는 주행성 곤충의 활동 시간에 맞춰서 피는 거다.
국내 남서부 지방에 드물게 사는 노랑원추리나 근래 도심지 화단에 심는 키트리나원추리는 야행성이다. 해 질 녘에 피기 시작해서 야밤에 짙은 향기를 내며 만개한다. 그 향기에 이끌려 밤에 활동하는 곤충은 꽃에게 다가갈 것이다.
그런데 박각시는 특이하게도 그 어둠 속에서 후각 말고 원추리의 시각적인 면모에 반응한다는 흥미로운 논문이 얼마 전에 나왔다. 밤에 핀 하얀 박꽃의 향기에 이끌려 박각시가 꽃의 내부에 들어간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밤에 피는 원추리와 박각시 사이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며 그건 꽃잎에 아로새겨진 어떤 문양 때문이라는 거다. 꽃이 자외선을 되쏘아 곤충의 눈에 잘 보이는 일종의 유도선을 만들어 곤충이 꽃가루 쪽으로 빨려들도록 한다는 것이다. 원추리의 치밀한 전술에 무릎을 친다.
자외선은 가시광선 밖에 있으니 보통의 사람 눈에는 무늬가 보일 리 없다. 낮에 피는 원추리 무리가 밤에 피는 쪽보다 눈에 먼저 들어온다. 전자는 짙은 오렌지색 꽃이 큼지막하게 피고 후자는 옅은 레몬색 꽃이 다소 작게 피어 차분해 보이니까. 밤하늘을 비행하는 박각시에게는 밤의 원추리 무리가 훨씬 더 휘황찬란해 보일 것이다. 원추리속 식물이 생존경쟁에서 우위에 서고 다양한 종으로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논문은 낮과 밤을 선택하여 피는 전략으로 종 저마다의 개화 시간과 방식에 맞춰 곤충과의 관계를 맺는 ‘공진화’를 그들이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외선 필터를 써서 곤충의 눈에 비치듯이 촬영한 논문 속 꽃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생각한다. 원추리는 꽃가루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생명체를 먼저 헤아리고 그들 취향에 맞게 단장을 하는구나, 곤충이 찾아올 시간을 짐작해서 꿀을 빚는구나, 원추리가 애타게 기다리는 건 잉태의 시간이구나, 하고.
베풀 ‘선’자에 풀 ‘초’자를 이고 있는 한자가 ‘원추리 훤(萱)’이다.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를 때 ‘훤당(萱堂)’이라는 말을 쓴다. 어머니가 계시는 방 가까이 심었다는 꽃,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담긴 꽃, 그 꽃이 폭우와 폭염을 헤치고 한창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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