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 [127] 장마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2023. 7. 3. 03:05
장마
내 머리칼에 젖은 비
어깨에서 허리께로 줄달음치는 비
맥없이 늘어진 손바닥에도
억수로 비가 내리지 않느냐,
비여
나를 사랑해 다오.
저녁이라 하긴 어둠 이슥한
심야(深夜)라 하긴 무슨 빛 감도는
이 한밤의 골목 어귀를
온몸에 비를 맞으며 내가 가지 않느냐,
비여
나를 용서해 다오.
-천상병(1930~1993)
천상병 시인이 서른 살이던 1961년에 발표한 시. 어이하여 그처럼 젊은 나이에 용서를 알게 되었나. 그의 인생 역정을 내가 다 알까마는, 내려치는 비를 우산도 없이 맞으며 ‘용서’를 빌 만큼 시인이 부모나 가족, 친구들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을까. 가난이 죄였겠지.
우리 몸의 아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어떤 시는 우리를 치유하고, 순진무구한 어떤 시는 종교의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천상병의 시는 눈앞에 펼쳐놓지 않고도 해설을 쓸 수 있다. 그만큼 강렬하다. “나를 용서해 다오” “나를 사랑해 다오” 두 구절이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공자님 말씀처럼 사악함이 없는 시. 시를 빙자해 자신을 내세운다든가 돋보이겠다는 간사함이 전혀 보이지 않는 시를 천상병은 썼다.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쓴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운율이 있고 앞뒤가 맞는다. 그는 소박한 언어의 마술사였다. 사랑과 용서를 남기고 떠난 시인이여, 저승에서라도 평화를 누리시기를….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조선일보에서 직접 확인하세요. 해당 언론사로 이동합니다.
- 北, 열흘 연속으로 GPS 신호 교란… 무인기 대응 훈련하는 듯
- 59년 지나도 밝혀지지 않은 진실...말콤X 유족 1400억원 소송
- 사유리처럼... 20대 43% “결혼 안해도 아이는 낳을 수 있다”
- ‘아웅산 테러’ 마지막 생존자, 최재욱 전 환경부 장관 별세
- 법원 “택시조합 기사 실업급여 반환 처분은 과해”
- "엔저 효과" 올해 韓-日 항공편 이용객 역대 최다 기록
- “경매장 생선 회뜨기 금지 안된다“…공정위, 노량진시장 상우회에 경고
- ‘수렴청정’ 박단, 의협 비대위 합류하나... 15명 중 3명 전공의 채우기로
- 美 전기차·배터리 업계, 트럼프 전기차 보조금 폐지에 반대 성명...“미국 일자리 성장 해칠 것
- 음주운전 사고 후 도주, 운전자 바꿔치기까지 시도한 40대… ‘징역형 집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