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 교수 “창조적 사고 막는 취업용 대학, 이제 없어져도 된다”
문화심리학자에 나름 화가이며, 현직은 어부(漁夫)라고 주장하는 김정운이 돌아왔다. “말도 되고 글도 되고 유머도 되는데 마스크까지 되니 이를 어쩌냐”며 ‘자뻑’을 일삼던 그의 뽀글파마엔 흰머리가 부쩍 늘었다.
야한 농담이 줄고 사뭇 진지해진 건 10년에 걸쳐 ‘대작’ 집필에 몰두한 탓이다. 그는 ‘창조적 시선-인류 최초의 창조학교 바우하우스 이야기’란 제목의 책을 들고 서울에 나타났다. 무려 1000쪽이 넘는 이 벽돌책의 테마는 ‘창조성(creativity)’. 김정운은 “이 책을 읽으면 당신 삶이 매우 창의로워질 것”이라며 어깨에 힘을 빡 줬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 대학에 사표를 던지고, 일본으로 가 그림을 배우더니, 여수에서 배로 1시간 20분 들어가는 섬에 정착한 그가 100년 전 독일 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에 꽂힌 전후 사정을 들었다.
◇소니에서 바우하우스로
-요즘 시대에 1000페이지 책이라니.
“바우하우스를 건축·디자인 학교로만 아는데, 내가 공부해보니 그 바운더리가 훨씬 넓었다. 지식 혁명의 근원이 거기 있었다.”
-10년이나 걸릴 일인가.
“14년밖에 존속하지 않은 학교라 그런가 자료가 많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직후 바우하우스(1919~1933)가 처음 세워진 독일 바이마르를 시작으로 데사우, 베를린을 훑으며 흔적 찾기에 나섰다. 헌책방에서 찾은 보석 같은 책들을 섬으로 보내는 기쁨이 어마어마했다.”
-집(haus)을 짓다(bau)란 뜻의 ‘바우하우스’는 현대 건축과 산업디자인의 뿌리로 여겨진다. 어쩌다 바우하우스에 꽂혔나.
“내가 ‘애플빠’다. 삼성은 왜 애플처럼 못 만드는지 항상 의문이었다. 아이폰은 그저 스마트한 기기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월터 아이작슨이 쓴 평전 ‘스티브 잡스’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프롬 소니 투 바우하우스(from Sony to Bauhaus)’. 좋은 건 죄다 베끼는 잡스가 소니를 버리고 바우하우스를 따라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애플 디자인이 바우하우스에 기반했다는 건가.
“애플 디자인 책임자였던 조너선 아이브가 독일 가전 회사 브라운 제품의 디자인을 대놓고 흉내 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브라운의 미니멀하고도 세련된 디자인은 대부분 디터 람스의 작품인데, 디터 람스의 계보를 찾아 올라가면 그 끝에 바우하우스가 있다.”
-그 전엔 바우하우스에 관심이 없었나?
“베를린에서 유학할 때 집에서 시내로 가려면 ‘바우하우스 아카이브’란 건물을 반드시 지나쳐야 했다. 13년 유학했으니 매일 왕복으로 1만 번 지나친 거다. 그런데 한번도 들어가볼 생각을 안 했다. 그저 독일 기능주의 건축의 시조(발터 그로피우스)라는 사람이 설계한 건물인데, 현재 슬럼화돼 사회 문제가 돼가는 아파트 단지를 고안해낸 주범들이라며 독일 사람들도 욕만 해댔다(웃음).”
-그럼 오로지 애플과 잡스 때문에 바우하우스에 빠졌다는 건가.
“전작 ‘에디톨로지’에서 나는 스티브 잡스가 지닌 천재성의 핵심이 ‘편집’이라고 주장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고, 그냥 뚝 떨어지는 것도 없다. 이미 존재하던 것들을 재구성해 남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편집해 내는 능력이 창조다. 잡스는 그 분야 달인이었다.”
-스티브 잡스의 창의력이 바우하우스와 무슨 상관인가.
“바우하우스야말로 전혀 다른 영역의 지식이었던 ‘예술’과 ‘기술’을 디자인과 건축이라는 실용 지식으로 편집해 낸 창조의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흔히 4차 산업혁명으로 부르는 지식 혁명은 20세기 초 바우하우스의 예술과 기술의 통합에서 시작됐고, 이는 애플의 마우스, 아이폰의 터치를 거쳐 챗GPT로 이어지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챗GPT의 기원이 바우하우스라고?
“마우스가 그 시작이다. 인공지능 연구가 급발전한 계기는 GPU(Graphics Processing Unit), 즉 그래픽 처리 장치 덕분인데, GPU의 개발은 GUI(Graphical User Interface)라는 컴퓨터 화면의 직관적 운영체제가 있어 가능했다. 화면에 그래픽으로 표현된 상징을 마우스로 클릭하면 해당 명령이 즉각 수행되는 GUI가 처음 탑재된 컴퓨터가 1983년 애플 리사다. 애플은 마우스에서 한 발짝 더 나간다. 마우스의 클릭을 손가락의 터치로 바꾼다. 아이폰으로 시작된 스마트폰이다. 엄마가 아기를 어루만지듯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원초적인 수단으로 기계를 만질 수 있게 한 거다. 촉각으로 일으키는 시각과 청각의 변화! 이 같은 ‘감각의 교차 편집’을 처음 실험하고 가르친 곳이 바로 바우하우스였다.”
◇당신도 창조적 인간이 될 수 있다
-책의 타이틀은 ‘창조적 시선’이다.
“챗GPT로 완전히 다른 세상이 온다고 난리다. 창조적 인간이 돼야 살아남는다고 겁준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창조적이 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희는 죽었다 깨도 다빈치처럼, 스티브 잡스처럼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바우하우스는 누구나 창조적 인간이 될 수 있고, 심지어 창조성을 가르칠 수 있다고 믿었다.”
-어떻게 가르쳤길래.
“칸딘스키, 클레 같은 최초의 추상화가들이 바우하우스 선생들이었다. 사진기의 출현으로 대상을 실물 그대로 재현하는 그림(구상화)에 의미가 없어지자 이들은 음악처럼 점, 선, 면, 색채를 음표 삼아 그림(추상화)을 그리기 시작했다. 학생들에게도 ‘색을 듣고 소리를 그릴 수 있는’ 감각의 교차 편집을 가르쳤다. 예를 들면 엉겅퀴를 손으로 만지고 그 따가운 느낌을 색과 형태로 표현하게 하는 식이다.”
-의식의 흐름대로 따라가는 ‘네트워크적 사고’도 창조력의 중요한 요소라고 썼더라.
“추상화와 함께 윌리엄 제임스의 ‘의식의 흐름’, 프로이트의 ‘자유연상’이란 개념이 등장한 시기가 1920년대 바우하우스 시기와 겹친다. 이때만 해도 창조적 사유는 천재들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우스가 등장하면서 보통 사람도 창조적 사유를 할 수 있게 됐다. 클릭만 하면 전혀 다른 영역으로 휙휙 건너뛰게 하는 마우스는 다양한 정보와 지식들을 연결해 편집하는 ‘네트워크적 사고’를 하게 했고, 거기서 창의적 콘텐츠가 속출했다. 연역법, 귀납법처럼 ‘트리(tree) 구조적 사고’를 하는 산업화·민주화 세대와 달리 MZ세대는 해시태그(#)로 끝없이 이어지는 정보를 빨아들여 새롭게 편집하는 네트워크적 사고를 한다. 그래서 세대 간 소통이 어려운 거다. 심리학자 입장에서 볼 때 오늘날의 갈등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세대 갈등이 핵심이다.”
◇대학, 없어져도 된다
-그 창의성이 대한민국에선 문화 영역에서만 발현된다.
“최근 독일에 가보니 베를린자유대학 한국어과 경쟁률이 어마어마했다. 내가 공부할 땐 한국어과 자체가 없었다. 지금은 한국어과 떨어지면 일본어과에 간단다. 여기에 엄청나게 창조적인 과정이 숨겨져 있다. 창조는 편집인데, 편집할 단위들이 많을수록 그 레벨이 높아진다. 서양 문화를 흉내 내고 따라잡기 위해 마구 흡입해온 콘텐츠와 우리 전통 문화적 콘텐츠가 결합되고 편집되면서 K팝, K드라마가 폭발한 것이다. 세계에서 유학생 수가 가장 많은 나라는 중국, 인도 순이지만 인구 대비로 따지면 한국이 압도적 1위다. 그만큼 전 세계를 다니며 다양한 콘텐츠를 축적했다는 뜻이다. 이걸 우리 식으로 해석할 문화적 자신감이 생기면서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 같은 걸작이 쏟아졌다.”
-그런데 왜 유독 대중문화에서만 창의가 꽃피었을까.
“정치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 아닐까. 분단된 한국 사회의 창의를 방해하는 건 적(敵)을 상정한 이분법이다. 그런 점에서 난 소위 386으로 불리는 민주화 세력이 빨리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교육의 창의성도 바닥이다.
“트리 구조의 계층화된 지식을 주입하고 외우게 하기 때문이다. K컬처로 성공한 스타들이 대부분 학교 공부엔 흥미가 없던 아이들이다. 그런 점에서 난 이제 대학이 없어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 대학은 철저하게 트리 구조다. 대학 안에 인문대 사범대 공대가 있고, 인문대는 다시 사회학과 심리학과 국문학과 등으로 세분화된다. 창의를 저해하는 지극히 근대적이고 낡은 형태다. 지식 생산의 권력이 더 이상 대학에 있는 것도 아니다. 논문 말고도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발표할 수 있는 매체가 널렸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창의적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저 성실하기만 한 기업 임원들이 젊은 직원들의 창의를 잘라버린다고도 했더라.
“한국 디자인이 망하는 이유는 디자이너들이 창조적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줘야 할 사람들이 직접 디자인을 하려고 달려들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이 코너에서 충주시 홍보맨(조선일보 4월17일자 A30면) 인터뷰한 걸 봤는데, 그가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유를 준 충주시장이야말로 메타적 창조자라고 생각한다. ‘비너스의 탄생’ 등 보티첼리의 그림이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히게 된 건 존 러스킨이라는 비평가가 그 속에 숨은 창의성을 알아봐줬기 때문이다. 나라를 이끄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다.”
◇인생 절정기에 섬으로 간 까닭
-작업실 이름이 미역창고(美力創考)더라. 왜 그렇게 창조에 목을 매나.
“재미있으니까. 내가 섬에서 혼자 사는 이유도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해 내기 위해서다. 인류가 이렇게 오래 살았던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늙어가야 행복한지 제대로 보여준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내가 실험하고 있다.”
-대학교수를 관두고 일본으로 미술 유학 다녀와 섬으로 들어간 때가 인기 절정기였다.
“최고 몸값의 강연자로 TV도 나가고, 광고도 찍고, 정치권 콜도 받았지만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이었나 회의가 들더라. 언제부턴가 내가 대중이 원하는 말만 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이건 아니다 싶더라.”
-외롭지 않은가?
“섬에 들어가 살겠다고 하니 너 같은 관종이 혼자 어떻게 사냐고들 걱정하더라. 그런데 난 이미 교토 촌동네에서 유학할 때 죽도록 외로워봤다. 오히려 고립은 쓸데없는 관계들을 끊어낼 기회다. 섬에서 살지 않았으면 이번 책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하루 일과는 어떤가.
“눈 뜨면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한다. 나체로(웃음). 그런 다음 어젯밤 잡은 물고기로 아침을 지어 먹고 낮 1시까지 글을 쓴다. 오후엔 주로 그림을 그리고, 고기는 밤에 잡는다. 낚시는 물때가 중요한데, 만조 되기 두 시간 전부터 만조 이후 두 시간까지가 제일 잘 잡힌다. 가끔 여행객들이 들어와서 낚시를 하는데 한심하다. 고기 잡힐 시간도 아닌데 종일 낚싯대를 걸고 있다가 허탕만 치고 쓰레기만 버리고 간다.”
-섬에서는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갈 것 같다.
“천만에다. 일주일만 살면 혓바닥에 바늘이 돋는다. 밥해야지, 설거지해야지, 청소해야지, 고기 잡아야지, 책 읽어야지, 문짝 고쳐야지. 그래서 주말엔 여수 시내에 나가 하루 쉬어줘야 한다. 사우나도 하고 짜장면도 먹고.”
-다음 책은 슈베르트라던데.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노래도 아름답지만 사랑을 한 번도 이뤄본 적 없는 슈베르트에게, 학창 시절 선생들한테 미움만 받은 내 처지가 이입되더라. 그 책은 정주에게 헌정할 거다.”
-고인이 된 김정주 넥슨 회장 말인가?
“쉰에 자유인이 된 나처럼 정주도 딱 50세가 되면 회사 팔고 다른 삶 살아볼 거라고 큰소리쳤었다. 바이올린 연주자이기도 했던 정주와 콰르텟을 만들어서 전국 순회 공연을 하는 게 꿈이었는데 먼저 갔다.”
-이번 책은 아버지에게 바쳤다.
“집필 막바지에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세 사람이 잇달아 사라졌다. 이어령, 김정주, 그리고 아버지. 고집세고 재수없는 날 사랑하고 인정해준 몇 안 되는 분들이다. 아버지는 모두가 섬 살이를 반대할 때 헤밍웨이도 바닷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며 응원해준 유일한 분이다. 근데 책이 좀 어려운가?”
-머리에 쥐날 정도는 아니다. 바우하우스 로드를 따라 여행하고 싶게 하는 책이다.
“장담하건대, 바우하우스를 이렇게 통찰한 책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내가 쓰고도 감동했다.”
-’자뻑’은 불치병인가.
“하하하! 그래서 사람들이 날 싫어한다. 특히 아저씨들.”
☞김정운
1962년생으로 고려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2년 명지대 교수를 그만두고, 일본 교토 사가예술대에서 그림 공부를 한 뒤, 여수의 한 섬에서 살고 있다. ‘에디톨로지’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남자의 물건’ ‘노는 만큼 성공한다’ 등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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