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세상] 수신료 분리징수 추진, 정부와 언론의 실패
KBS 수신료를 전기요금에 통합해 징수하던 것을 금지하는 방송법 시행령안이 곧 강행 통과할 것 같다.
이 일의 시발은 대통령실이 지난 3월 초부터 한 달간 홈페이지에서 관련 의견을 모은 것이다. 언론들은 이 조사에서 ‘통합징수 반대’가 96%를 넘었다고 보도했다. 이어 대통령실의 사실상 명령을 받은 방송통신위원회는 통합징수를 막는, 즉 분리징수를 뜻하는 시행령 개정안을 부랴부랴 마련해 단 열흘간 입법 예고했다. 그런데 KBS가 분석한 바로, 개정안에 대한 공개의견 중 이번엔 ‘분리징수 반대’가 90%라고 한다. 이런 극명한 차이는 정부와 언론 모두 시민 의견 수렴 단계부터 이미 실패했음을 방증한다.
문제 제기부터 편향이었다. 대통령실의 의견 수렴 페이지 발문은 법적으로 불가능한 “수신료 납부거부권”을 마치 유효한 듯 거론하며 시작했다. 이어서 “프랑스(FTV), 일본(NHK) 등에서 수신료를 폐지하거나 인하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고 했다. 징수방식과 관련 없고도 불완전한 정보다. 수신료 통합징수에 “헌법소원심판이 청구된 적”이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소원은 각하됐고 대법원에서도 유사한 소송이 기각됐다는 사실은 빼놓았다. 이렇게 원하는 방향으로 답을 몰아가는 것을 ‘푸시 폴’(push poll), 즉 “조사를 가장한 정치 캠페인”이라고 한다. ‘통합징수 반대 96%’도 의견 기입란 바로 위, (이번 의견 조사에 대한) ‘추천’ 아이콘을 누른 사람의 수를 ‘반대’라고 맘대로 치환해 계산한 것이다. 이 수치를 “여론조사 결과”라며 보도하는 것은 왜곡이다. 비판적 기사들도 잘못된 정보를 그대로 옮기고는 한 사람이 조사에 여러 번 참여할 수 있다는 등의 우려만 진지하게 펼쳤다. 인터넷 기사 댓글난에서도 보는, 엄지가 올라가거나 내려간 모양의 흥미 유발용(?) 추천/비추천 아이콘이 졸지에 대한민국 수신료 징수방식을 결정짓는 시민 의견으로 둔갑해 공증됐다!.
대통령실 홈페이지를 찾아온 사람들이 시민 전체를 대표하지도 않았다. 시행령 입법 예고에 의견을 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실에는 이 캠페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것이다. 입법예고 기간에는 이에 화급히 대응한 반대자들이 찾아갔을 것이다. 굳이 대표성을 가지려면 무작위 선발한 사람들로 조사하거나, 아예 국민투표를 해야 한다. 물론, “대통령실 특활비를 없앨까요?”와도 같은, 답이 뻔히 예상되는 찬반 질문을 설문이나 국민투표로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공공서비스 정책 변화는 신중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그래야 이해당사자가 급격한 변화에 대비할 수 있다. 정부도 혹시나 생각하지 못한 부작용이나 관점이 있는지 등을 알아야 한다. 2017년 영국 BBC의 칙허장(방송허가) 갱신을 앞두고 영국 정부는 이른바 ‘공중 협의’(public consultation) 절차를 거쳤다. 4개월에 걸친 시민 대상 조사에선 “BBC의 역할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재원은 어떻게 할까?” “의회, 정부, 감사원과의 관계는 어떻게 할까?” 등을 포함한 19개 질문이 망라됐다. “재허가할까 말까?” 식의 질문은 당연히 없었다. 많은 단체가 구성원들에게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의 의견을 제시하라고 독려했고 자신들이 낸 의견을 공개하기도 했다.
영국 정부는 결과 보고서를 공표하고 후속 논의를 이끌어냈다. 이것에 그치지 않고 별도의 광범위한 검토(review) 등 공론과정을 통해 향후 10년간 BBC의 역할과 재원 등을 규정한 것이 BBC 칙허장이다. 공영방송을 대체로 싫어하는 보수당 정부지만 그것의 책무성을 명확히 정하고 발전시키려는 접근에 품격을 잃지 않았다. 이에 비해 너무도 가벼운 졸속행정 및 언론의 비과학적 태도와 자발/비자발적 동조 속에 한국 공영방송이 크게 멍들어가고 있다.
강형철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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