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想과 세상] 영랑호에서

기자 2023. 7. 3.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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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가 그물을 입었다
호박 덩굴이 걸려든다
덩굴이 걸려들자 간지러워 못 참겠다는 듯
노란 호박꽃들 다투어 핀다

꿈속 피붙이 만나듯 그 길로 산책 나간다
원고지 같은 그물 입고 있는 바위에 걸려든 것
그물을 잡고 기어오르는 덩굴손에 걸려든 것

귀청을 찢는 매미 울음 멎고 매미들 다 어디 갔나 궁금할 즈음
덩굴손 한창일 땐 보이지 않던
가파른 벼랑 끝 칸과 칸 사이 커다란 적멸보궁 한 채

붕붕거리는 입들이 드나들던 꽃 한 송이 적멸보궁이 될 때까지
바위의 정수리는 또 얼마나 간지러웠을까
무수한 내일의 꽃들
펼쳐질 수많은 웃음과 염원들
절벽 위에 있다

박홍점(1961~)

바위가 입고 있는 건 실제 그물이 아니다. 호박 덩굴이 타고 오를 수 있도록 지지대 대신 매어놓은 줄이다. 그 줄을 타고 오르던 덩굴에서 호박꽃이 다투어 핀다. “간지러워 못 참겠다는 듯” 꽃이 핀다니, 재미있는 발상이다. 산책에 나서는 시인, 글이 잘 안 써지는 모양이다. “꿈속 피붙이 만나듯”이라는 표현은 의미심장하다. 실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아닌 척 슬쩍 끼워 넣었다. 바위나 덩굴손에 걸린 게 아니라 곁을 떠난 피붙이 생각이 간절했던 듯하다.

“귀청을 찢는 매미 울음”은 시인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한다. 매미들이 다 사라지고, 호박 덩굴도 시들어갈 만큼 시간이 흐르자 비로소 마음에 평안이 찾아온다. 견딤의 시간이 금방 지나갔을 리 없다. 다시 바위를 찾은 시인의 눈에 호박이 들어온다. “가파른 벼랑 끝 칸과 칸 사이”에 열린 커다란 호박, 영락없는 적멸보궁이다. 간지러움을 참는 건 ‘수행’쯤 될 듯. 한 통의 호박에는 “내일의 꽃”을 피울 많은 씨가 들어 있다. 한데 어쩌나, 절벽 위에 위태로우니.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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