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일베정치, 차관정치, 공포정치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한국자유총연맹 제69주년 창립기념행사에서 “우리는 올바른 역사관, 책임있는 국가관, 명확한 안보관을 가져야 한다”면서 “왜곡된 역사의식, 무책임한 국가관을 가진 반국가세력들은 북한 공산집단에 대해 유엔 안보리 제재를 풀어달라고 요청하고 유엔사를 해체하는 종전 선언을 노래 부르고 다녔다”고 말했다.
이튿날 대통령실은 “지난 정부나 특정 정치 세력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라고 한발 뺐지만, 문재인 정부가 종전선언을 일관되게 추구했다는 점에서 윤 대통령이 말한 반국가세력은 문재인 정부나 당시 여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반국가세력에 호응하는 말은 대화와 타협이 아니라 박멸이나 척결이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나와 다른 생각의 공존을 인정하는 상대주의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정책을 폈다고 반국가세력이라고 낙인찍는 건 파시스트의 언어이지 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의 언어가 아니다.
최근 여권 인사들이 극언을 쏟아낸 것도 우연이 아니다. 국무총리 직속 자문기구인 경찰제도발전위원회 박인환 위원장은 지난달 28일 내년부터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이 경찰로 이관되는 것과 관련해 “문재인이가 간첩이라는 걸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최근 간첩단 사건이 나오는데 문재인 비호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라며 “(대공수사권 이관까지) 이제 6개월 남았는데 70% 이상의 국민이 모르고 있다. 문재인이 간첩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다”고 했다. 김채환 신임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차관급) 내정자는 지난달 6일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올린 영상에서 “(윤 대통령이) 보다 획기적으로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느린 방법 말고 보다 빠르고 전격적인 행동에 나서야 한다”면서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헌법 제76조에 규정된 긴급 명령을 발동하여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세력들을 해체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의 발언은 이런 극우적 인식이 여권 내부에서 지배적인 세계관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발맞춰 ‘정부의 왼손’에 해당하는 부처나 각종 위원회에 대한 무력화, 희화화 작업도 착착 진행 중이다. “북핵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북한 전체주의 체제의 파괴”라고 주장하는 극단적 대북 대결론자를 통일부 장관에, “(이태원 참사는) 피해자들이 몰주의해서 스스로 너무 많이 모였다가 참사가 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국가인권위원에 앉히는 식이다. 가히 일베정치의 제도화라고 할 만하다.
윤 대통령이 국회 과반 의석을 점한 야당을 대화의 상대로 여긴다면 반국가세력 운운하지 않을 것이다. 내년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노리되, 그전까지는 의회정치를 포기하고 행정부 재량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밀어붙이자는 게 윤 대통령 생각인 것 같다. 그러자면 직업 공무원들을 확실히 틀어쥐어야 한다. 그 방편 중 하나가 장관 대신 차관을 교체하는 이른바 차관정치이다. 위험하고 번거롭기 짝이 없는 국회 인사청문 절차를 피할 수 있는 데다 대통령실과 코드가 맞는 실세 차관을 내려보내 각 부처의 업무를 직할할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는 격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는 공무원들에게는 감사와 수사가 기다린다. 윤 대통령이 ‘수능 난도’ 말 한마디로 수능을 불과 5개월 앞두고 교육부 대입담당 국장과 교육과정평가원장을 날려버린 것은 공직사회에 던지는 강력한 시그널이다. 말을 듣지 않으면 지위고하와 시기에 상관없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구도의 핵심은 감사원이다. 최근 감사원이 핫코너로 급부상한 것은 공직사회를 틀어쥐기 위한 윤석열식 공포정치의 축이 감사원이기 때문이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2015년 남녀 동수 내각을 꾸린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지금은 2015년이니까요.” 시간은 진보의 벡터라는 역사관을 산뜻하게 표현한 것이다. 반면 지금 한국은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말한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보여주는 실험장 같다. 1950년대식 아부(윤 대통령에게 입시에 대해 많이 배운다는 교육부 장관), 1960·1970년대식 반공주의, 1980년대의 살풍경이 어른거리는 파업·집회·시위 대응, BTS 등 K콘텐츠의 세계적 성공, AI와 챗GPT가 같은 시공간에 어지럽게 섞인 모습은 그로테스크한 부조리극 같다. 지금은 2023년이고, 여기는 대한민국이다.
정제혁 사회부장 jhjung@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빗속에 모인 시민들···‘윤석열 퇴진·김건희 특검’ 촉구 대규모 집회
- 트럼프에 올라탄 머스크의 ‘우주 질주’…인류에게 약일까 독일까
- 최현욱, 키덜트 소품 자랑하다 ‘전라노출’···빛삭했으나 확산
- 사라진 돌잔치 대신인가?…‘젠더리빌’ 파티 유행
- “나도 있다”…‘이재명 대 한동훈’ 구도 흔드는 경쟁자들
- 제주 제2공항 수천 필지 들여다보니…짙게 드리워진 투기의 그림자
- 말로는 탈북자 위한다며…‘북 가족 송금’은 수사해놓고 왜 나 몰라라
- 경기 안산 6층 상가 건물서 화재…모텔 투숙객 등 52명 구조
- [산업이지] 한국에서 이런 게임이? 지스타에서 읽은 트렌드
- [주간경향이 만난 초선] (10)“이재명 방탄? 민주당은 항상 민생이 최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