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층시사국] 위기의 반도체, 일본은 뛴다
한국 반도체의 신화, 이병철 삼성 회장이 KBS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만년의 이 회장은 인터뷰 도중 후배 기업인들에게 조언을 하려는 듯한 모습을 자주 보였습니다.
[고 이병철/삼성그룹 창업주]
“우리 미래 경제의 호불황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반도체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에서 64K D램을 개발한 뒷얘기를 털어놓습니다.
[고 이병철/삼성그룹 창업주]
“삼성은 지금까지 기술 도입에서 큰 고생을 겪었습니다. 반도체 기술도 일본에서 꽉 거머쥐고 안 놓았습니다. 64K D램 기술은 미국에서 들여왔습니다.”
미국 마이크론사의 기술, 일본 업체와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던 마이크론사의 기술이 한국 반도체의 초석이 됐습니다.
[고 이병철/삼성그룹 창업주]
“일본이 (반도체를) 양산해서 미국과 세계를 시장으로 생각하고 아주 난매(亂賣:가격차별)를 했습니다. 그러니 미국의 모스 테크놀로지 같은 데는 12억 달러를 손해봤다고 그럽니다.”
미일 반도체 전쟁을 기회로 삼아 한국 반도체 산업을 일으킨 겁니다.
[제프리 케인/'삼성 라이징' 저자]
"이전에 회장과 일했던 전직 삼성 경영진을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들은 1990년대를 영광스러운 순간으로 기억했습니다. 일본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물러나면서 그들은 삼성이 결국 승자가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엔 미국과 중국 사이에 반도체 경쟁이 불붙었습니다.
한국 반도체 업계엔 또다시 파고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40년쯤 전, 이병철 회장이 했던 말들이 어제오늘의 말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고 이병철/삼성그룹 창업주]
“반도체라는 것은 금년(올해)이 최악의 해이잖아. 세계 전문가들이 다 그렇게 얘기하고, 나도 최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악의 해인데 문제는 명년(내년)부터는 삼성 반도체뿐만 아니라 미국 반도체도 이제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이 완전히 안 보이겠느냐. 또, 내년에 안 보인다고 그래도 이 반도체만은 영원히 살 수 있는 상품입니다.”
[9층시사국 22회 I] 위기의 반도체, 일본은 뛴다
G7 정상회담은 중국 견제에 한 목소리를 내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리시 수낵/영국 총리]
“성명서를 통해 우리는 G7으로서 다른 나라들과 함께 협력할 것을 분명히 했고, 중국으로부터 촉발된 취약한 공급망 문제를 디리스킹(위험 관리)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중국이 내민 반격 카드, 미국 반도체 업체, 마이크론에 대한 제재였습니다.
[마오닝/중국 외교부 대변인]
"제품의 사이버 보안 문제가 국가의 정보 인프라 보안을 위협하지 않도록 국가 안보를 보호하기 위해 검토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미중 경쟁의 최전선이 바로 반도체라는 걸 분명하게 보여준 겁니다. 바이든 대통령도 같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눈코뜰새 없이 바빴던 G7 일정의 와중에 히로시마 대학 관계자를 만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일본과 반도체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겁니다.
익숙한 이름이 등장합니다. 중국에서 퇴출된 마이크론, 바이든 대통령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일본과 손을 잡았습니다.
[박재근/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
“일본이 거의 시장을 잃었는데 마이크론이 다시 D램의 생산공장을 일본에서 만들겠다는 거죠. 그러니까 일본 입장에서는 ‘메모리반도체가 다시 돌아오는구나’라고 생각하니까 정부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고요.”]
우리에게 64K 디램 기술을 전해줬던마이크론이 이번에는 일본과 밀착하고 있습니다.
히로시마 대학은 마이크론 히로시마 공장으로부터 4km, 약 5분 거리에 있습니다.
[후사타니 코우다이/히로시마대 학생]
“입학 당시부터 알고 있었어요. 제가 입학할 때는 마이크론 근처 공장에서 마이크론의 설명회가 있었어요.”
미국 최대 메모리업체 마이크론은 일본에 각별한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마이크론은 히로시마 공장에 5천억 엔, 우리돈 4조 원 이상을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현재 메모리반도체의 절반 이상을 타이완에서 생산하고 있는데, 일본에서의 생산량을 늘려 '디리스킹', 즉 위험을 줄이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박상준/ 일본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점점 미중 마찰이 심해지면서 일본이 업혀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죠. 이 틈에 미국과 더 돈독히 하면서 반도체 시장에서 존재감을 좀 더 낼 수 있겠다 하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 최초로 EUV, 즉 노광장비를 들여오기로 했습니다. 차세대 최첨단 메모리의
생산 기지로 키우겠다는 겁니다. 일본 정부는 투자금의 40%를 보조금으로 대주겠다며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기시다 후미오/일본 총리]
“저는 집권 초기부터 일본의 반도체 산업 활성화와 투자 확대를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1970~80년대 세계 반도체 업계를 호령했던 일본, 미중 반도체 전쟁의 와중에서 재도약의 기회를 위해 뛰고 있습니다.
<스튜디오>
남현종/9층시사국 MC
1980년대에는 반도체 시장을 두고 누구보다 서로에게 무역 보복을 했던 미국과 일본인데 지금은 굉장히 빠르게 손을 잡았습니다.
조혜진/9층시사국 취재기자
당시 반도체 전쟁의 주인공이었던 미국과 일본, 이 양국 간의 갈등은 거의 10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세계를 호령하던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사양길로 걷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죠.
반면 강대국 사이 반도체 전쟁이 우리 기업에게는 기회가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입니다. 이번에는 일본이 이런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서 이번 미중 반도체 전쟁에서는 기회를 잡겠다, 이렇게 나서고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시다 총리, 현재 일본 총리의 지역구인 히로시마에 미국 기업인 마이크론의 투자, 이건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로 볼 수 있겠습니다.
남현종/
지금 일본 정부 차원에서 발 벗고 나서서 작정하면서까지 일본의 반도체 산업을 부흥시키겠다는 걸로 보이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까?
조혜진/
일본은 지난 2021년부터 반도체 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돈으로 20조 원에 이르는 돈을 뿌리고 있는 건데요. 앞서 보신 것처럼 마이크론과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일본 내 투자를 할 경우 그 투자금의 절반 혹은 3분의 1가량을 보조금으로 지급을 하기도 하고요.
2027년부터 2나노 이하의 차세대 반도체 양산에 나서겠다, 이렇게 선언한 일본 기업이 있는데요. 바로 라피더스입니다. 이 라피더스에는 일본의 글로벌 기업들, 소니라든지 키옥시아, 도요타 같은 기업 8곳이 합작을 해서 만들었는데요. 이 라피더스에만 700억 엔을 지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과감한 투자는 실제로 일본 내에서도 눈에 띄는 변화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VCR>
구마모토 동쪽의 기쿠요마치. 드넓은 옥수수 밭 사이 서울월드컵경기장과 비슷한 규모의
거대한 공장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TSMC와 일본의 소니, 덴소가 합작한 회사, JASM이 반도체 팹을 짓고 있습니다. 휴일인 일요일 오후지만 현장에서는 출근하는 근로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다나카(가명)/공사장 근로자]
"제가 작년 6월에 왔을 땐 땅을 고르고 있었는데요. 지금은 벌써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으니까요. 일본에서 가장 빠른 공사 현장이라고 불립니다. 그만큼 아주 속도가 빨라요."
2년 안에 완공을 목표로 24시간 3교대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공사 현장 앞에 가득한 각종 광고판들. 고가매수, 토지, 주택 건설, 인력회사 등이 눈에 띕니다. 광고를 내건 부동산 회사를 찾아가봤습니다.
이곳에서 34년 동안 2대째 부동산 사업을 하고 있는 사토시 씨.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사토시 마츠나가/부동산 중개인]
"예전에는 공실이 많아서 힘들어하는 지역이었는데요. 지금은 수요가 아주 많아졌기 때문에 공실률도 줄고, 활기가 넘치고 있습니다."
주택용지, 공업용지할 것 없이 1년 새 2배가량 모두 가격이 뛰었습니다. 사토시 씨는 하루에도 수차례 공장 인근을 오가며 부지를 보여주기 바쁩니다. 순식간에 올라간 건물만큼이나 빠르게 치솟은 땅값은 일본 전역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토시 마츠나가/부동산 중개인]
"가슴이 요동치는 느낌입니다. 두근두근하고 너무 즐겁습니다. 버블 때 같아요."
활력이 생긴 것은 부동산 시장 뿐만이 아닙니다.
[츠카사 오오가미/종업원]
"어제도 그렇고, 금요일이나 토요일에는 사람이 많습니다. 가게 옆에 식당이 있는데 거기에도 맥주를 마시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요."]
[사토시 마츠나가/부동산 중개인]
"예전에는 7~8천엔이였는데 지금은 1만1천엔까지 호텔 가격이 올랐어요. 구마모토 시내의 호텔보다 더 비싸졌습니다. 역전한 상태입니다."
인구 유입이 늘면서 철도 노선 연장, 호텔 추가 건립 등 마을 인프라에 대한 투자도 늘고 있습니다. 공장에서 20km 떨어진 시내의 한 음식점. 공장 근처 식당엔 자리가 없어 시내로 나왔습니다.
[스즈키/전기 공사 담당 직원]
"2년 전에 일 때문에 이곳에 왔었는데 그때는 코로나도 있어 텅 비었고 사람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 인근 식당은 예약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교통, 숙박, 식당에 이르기까지 전례 없는 '호황기'를 맞이했습니다. TSMC 공장 유치로 인한 경제 효과는 약 4조 엔, 한화 36조 원 규모로 추정됩니다.
[이마무라 타로/일본 기쿠요마치 반도체산업지원실장]
"하나의 투자로 구마모토에서도 역대 최대의 경제 효과라고 생각합니다. JASM의 투자금이 1조 엔인데요. 그 규모의 투자도 일본 내에서도 처음이지 않을까요. 구마모토에서도 당연히 처음이고요."
이러한 경제 효과야 말로 일본 정부가 노린 것입니다.
[박상준/일본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어느 나라 정치나 마찬가지죠. 자기네 나라 경제를 살릴 수 있다면, 경제를 살린다는 느낌이 들면 그게 표가 되니까요. 일본에서는 지금 굉장히 뭐랄까요? 한국보다는 절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지금 국가 부채 문제도 굉장히 심각하고요."
<스튜디오>
남현종/
반도체 공장 하나가 들어섰는데 지역 경제에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래도 그만큼 일본 안에서도 걸고 있는 기대가 커 보이고요.
조혜진/
네, 그렇습니다. 최근 워런 버핏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대만에 투자하는 것보다 일본에 투자하는 게 만족스럽다. TSMC의 지정학적 위기를 언급하면서 얘기한 말인데요. 실제로 이 TSMC가 일본에 공장을 늘리고 있고 이 소식을 듣고 반도체 회사들이 일본으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일본 내에서는 반도체 훈풍이 불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최근 엔저까지 겹치면서 일본 증시, 니케이지수가 버블 붕괴 이후 33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치솟았습니다. 이런 경제 효과를 톡톡히 누리면서 일본은 위기를 기회로 삼고 있는 겁니다.
남현종/
그럼 지금의 이러한 일본의 노력들이 정말로 일본 반도체 산업의 부흥을 이끌 수 있을까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나아가서 걱정되는 건, 우리 기업들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을까 생각도 듭니다.
조혜진/
일본 기업들의 어떤 양산 기술이 우리 기업을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1980년대 초 우리 기업인 삼성이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었을 때 이 삼성을 보는 시각 역시도 비슷했습니다. 마냥 안심할 수는 없다 정도로 결론을 낼 수 있을 것 같고요.
특히 일본 같은 경우에는 반도체 중에서도 소재, 부품, 장비에 강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네덜란드의 ASML처럼 일명 슈퍼 을이 되고자 한다는 지적은 타당해 보입니다.
최근 이런 기사가 나왔습니다. 일본 정부 펀드가 반도체 제조 핵심 소재인, 또 시장 점유율 1위인 일본 기업, JSR에 대한 공개 매수에 나선다, 이런 내용이었는데요.
이런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 그 시장에서 중요한 회사를 일본 정부에서 나서서 일종의 전략 물자화 하는 것, 그리고 일본 내 파운드리를 확대해 자국의 어떤 수요를 좀 안정화하면서 일본의 소부장 기업들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역시도 일본의 움직임을 주시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요.
<VCR>
미중 반도체 전쟁은 세계 반도체 업계에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유리한 고지를 차근차근 선점해나가며 재도약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 반도체 업계엔
쉽지 않은 선택들이 연이어 던져지고 있습니다.
KBS뉴스
“중국의 경제적 강압을 직접 경험한 한국도 마이크론의 빈자리 채우기를 차단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요구도 제기됐습니다.”
“공급망 안정성 유지를 위한 협력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기로 했다면서, 콕 집어서 '반도체 공급망에서의 대화와 협력'을 언급했습니다.”
일본처럼 새로운 틈새를 찾아나가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입니다.
[박상준/일본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우리가 비어있는 공간은 반도체 공급망 속에서 굉장히 많아요, 우리가 비어있는. 그 비어있는 부분들을 적극적으로 유치를 하면 당연히 고용에도 도움이 되고 우리의 반도체 역량을 강화하는 데도 도움이 되죠."
‘반도체 전쟁’의 최전선에 나선 국내 업체에 대한 적극적 지원도 중요합니다.
[박재근/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
"우리나라는 공장을 하나 구축하는 데에 6년에서 8년이 걸리는데 대만은 2년 6개월, 미국도 2년 6개월, 중국은 2년이면 공장 하나를 지어버려요. 그래서 그런 인프라 구축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중요합니다."
지난 수십년간 다져온 한국 반도체의 역량을 잘 활용할 필요도 있습니다.
[제프리 케인/‘삼성 라이징’ 저자]
“한국이 세계 시장에서, 혹은 기술 시장에서 강자의 위치에서 협상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게 불리한 거래에 있어서는 물러서지 않고 자신이 가진 강점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병철 회장이 그랬던 것처럼,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해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병철/고 삼성그룹 창업주]
“세계 경제 상황이 어떻게 되느냐를 조사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매년 그렇게 함으로써 항상 삼성은 계획을 할 때 ‘불황이 온다’는 이러한 전제 하에서 좀 계획을 합니다.”
외부촬영: 조선기
영상편집: 손보라
자료조사: 김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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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진 기자 (jin2@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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