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하지 않고 반짝이도록…뇌 자극에서 ‘기억’의 길 찾기[신경과학 저널클럽]
기억력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공부법을 써야 할지,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할지와 같은 고민은 누구나 한 번쯤 해 봤을 것이다.
‘기억’은 뇌과학 연구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뿌리가 깊은 분야 중 하나이다. 기억에 관한 유전자 연구도 많이 진행됐는데, 생쥐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더 똑똑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여럿 있었다. 아직 사람에게까지 이어진 연구는 없었지만, 그동안의 사람과 동물 연구를 통해서 기억이 뇌에 저장되는 과정은 어느 정도 파헤쳐졌다.
우리가 기억하는 사실들은 두뇌의 ‘해마’라는 곳에서 먼저 처리된다. 해마에서 어느 정도 유지되던 기억이 장기적으로 저장되려면 기억의 흔적들을 우리 뇌의 가장 표면에 있는 주름 구조인 ‘신피질’로 옮겨야 한다.
이 과정에서는 해마와 신피질에서 특정한 주파수의 뇌파가 강화되고, 또 서로 동조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특히 기억에 중요한 것으로 알려진 느린 뇌파가 깊은 잠을 자는 동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질 좋은 수면이 기억력 향상에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까지 나타난 뇌 관련 이론을 바탕으로 기억력을 좋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이스라엘 텔아비브대의 유발 니르 교수와 미국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 캠퍼스의 이착 프리드 교수 연구진은 뇌공학 기법을 이용해서 이 질문에 접근했다.
연구진은 사람에게서 직접적인 증거를 찾고자 했다. 수술이 필요한 중증 뇌전증 환자는 발병 부위를 정확히 진단하기 위해 뇌에 잠시 전극을 이식하게 된다. 기왕에 전극을 이식한 환자들의 동의를 얻어 연구진은 깊은 잠을 잘 때 나타나는 느린 뇌파에 맞춰 뇌를 전기로 자극했다.
뇌 자극이 기억력을 증진시켰는지 알아보기 위해 연구진은 피험자들에게 간단한 기억 검사를 진행했다. 저녁 무렵 피험자들은 유명 인물과 동물이 함께 있는 25개의 다른 장면을 잠깐씩 보게 됐다. 예컨대 영화배우 매릴린 먼로는 고양이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앵무새와 함께 나타났다. 그리고 잠시 뒤 피험자들은 화면에 제시된 인물과 짝을 이뤘던 동물이 무엇이었는지 맞춰야 했다.
이따금 화면에는 간디와 같이 애초에 동물과 함께 보여준 적 없는 유명인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연구자는 두 종류의 기억력을 검사할 수 있었다. 하나는 유명인과 동물의 짝을 연결하는 ‘연상 기억 능력’이었다. 다른 하나는 유명인이 동물과 함께 등장한 적이 있는지를 떠올리는 ‘재인 기억 능력’이었다.
잠을 자는 사이 느린 뇌파에 맞춰 뇌 자극이 진행됐고, 다음날 아침 피험자들은 어제의 시험을 다시 봤다. 느린 뇌파와 무관하게 뇌 자극을 받은 사람에 비해 느린 뇌파에 맞춰 뇌 자극을 받은 경우에 재인 기억은 유의미하게 증가했다.
아쉽게도 연상 기억에는 별 영향이 없었다. 마치 어떤 시험 문제가 어제 공부한 내용인지 아닌지는 더 잘 기억하게 해 주지만, 그래서 답이 무엇인지를 더 잘 기억하게 해 주지는 못한 셈이다.
느린 뇌파에 맞춘 뇌 자극은 또 해마와 신피질 사이의 동조도 강화시켰다. 동조 효과를 강하게 보인 사람일수록 기억력의 향상 폭도 높았다. 이는 해마와 신피질 사이의 뇌파 간 동조가 기억의 근간이 된다는 기존 가설을 지지하는 것이다.
오늘 소개한 연구처럼 뇌 과학은 동물 실험에서 얻은 기초 지식을 사람으로 옮기는 성공 사례를 만들고 있다. 기억력처럼 인간의 근원적인 지적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기술이 우리의 삶을 어떤 모습으로 바꿔갈지 궁금해진다.
최한경 대구경북과학기술원 뇌과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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