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구 “맑고 순수한 ‘신병 캐릭터’ 때 묻은 제가 잘할까 고민”

이강은 2023. 7. 2.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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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만에 ‘나무 위의 군대’로 연극무대 복귀
전쟁 속 나무 위 피신한 군인들
상관·신병 사이 믿음·의심 그려
관객에 전쟁 참상·무익함도 전달
“이해 안 되는데 맹목적인 믿음
현실서도 발생… 갈등 끝에 부패”

연극이 시작되면 거대한 나무를 중심으로 신비감이 묻어나는 여인과 남루한 군복 차림의 병사 두 명이 무대에 등장한다. 본토와 멀리 떨어진 어느 나라의 섬에서 전투 중 쫓겨 나무 위로 피신한 ‘상관’과 ‘신병’ 이야기가 중심이다. 상관은 신병 앞에서 전쟁 경험이 많은 베테랑 군인 행세를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살고 싶어서 나무 위에 숨은 뒤 지원군이 오기만 기다릴 뿐이다. 신병을 ‘야’라고 부르며 무서워 숨는 게 아니라 ‘잠복 작전’이라고 우긴다. 맹목적인 애국심과 군에서 주입한 대의명분에 사로잡혀 고집불통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저 나고 자란 터전인 섬을 지키려 입대한 신병은 그런 상관이 이해가 안 되더라도 ‘상관님’이라고 깍듯이 대하며 믿고 따른다. 그렇게 둘은 생존을 위해 의지하면서 전쟁에 대한 관점이나 삶의 가치관 차이에 따라 대립하고, 어떨 때는 살의까지 품을 만큼 의심하며 충돌한다. 어느덧 나무 위에서 두 번째 겨울을 맞이한 두 사람. 적군이 처음부터 둘의 존재를 알고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쓰레기장에 놔둔 편지글을 보고 충격에 빠진다. ‘전쟁은 2년 전에 끝났습니다. 어서 거기서 나오세요.’

일본의 2차 세계대전 패전 당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연극 ‘나무 위의 군대’는 전쟁의 참상과 무익함을 전하면서 인간 본성의 취약한 지점들을 건드린다. 극 중 ‘신병’ 역의 손석구와 ‘상관’ 역의 김용준이 은신처인 나무 위에서 적군 야영지를 감시하는 장면. 엠피앤컴퍼니 제공
지난달 20일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U+스테이지에서 개막한 연극 ‘나무 위의 군대’는 전쟁의 참상과 무익함을 전하면서 한쪽에 치우친 신념의 위험성과 같이 인간 본성의 취약한 지점들을 보여준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5년 4월, 일본 오키나와에서 자국 패전 사실을 모른 채 1947년 3월까지 ‘가쥬마루’란 나무 위에 숨어 지냈던 병사 두 명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일본 작품이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구씨 역)와 영화 ‘범죄도시2’(악당 강해상 역) 등으로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배우 손석구(40)가 신병 역을 맡아 화제가 됐다.

2014년 연극 ‘사랑이 불탄다’ 이후 9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 손석구는 4년 전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출연을 계기로 친해진 배우 이도엽(51)의 권유로 하게 됐다. 그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2인극을 하고자 여러 대본을 봤는데, 이 작품이 지금 시대 관객들이 볼 때 가장 땅에 붙어있는 작품일 것 같았다”며 “상대가 옳다고 믿기 때문에 싸울 수 없지만 이해되지 않는 답답함과 부조리가 개인적으로 크게 공감됐다”고 말했다. “이해가 안 되는(상황인)데도 누군가를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하는 일이 가정이나 학교, 직장 등에서 벌어지잖아요. 계급이 있고 서로 능력치와 경험이 달라 갈등이 생기는데 그 믿음 때문에 썩어들어가는 거죠.”

연극 ‘나무 위의 군대’에 출연하는 이도엽(왼쪽부터)·손석구·최희서·김용준이 지난달 27일 기자간담회를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는 이어 “신병 캐릭터가 여태까지 제가 해왔던 역할과 달리 나이나 정서적으로 맑고 순수한 사람”이라며 “저처럼 때 묻은 사람이 (신병 역할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컸다(웃음)”고 덧붙였다. 본인 우려와 달리 손석구는 순박하면서도 전쟁의 공포와 참상에 고통스러워하는 신병의 모습을 실감 나게 연기한다. 다만 연기 스타일은 TV·영화 등 매체에서 보던 것과 별 차이가 없다. 300석 조금 넘는 규모의 소극장 연극인데도 배우들이 마이크를 사용하는 것과 무관치 않다. 마이크 힘을 빌려 연극적 발성에 대한 부담 없이 섬세한 감정 연기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관 역을 번갈아 가며 맡는 이도엽, 김용준(52)과 손석구의 합도 척척 맞는다. 이도엽과 김용준은 연극무대 경험이 많은 베테랑 배우답게 손석구의 연기를 잘 받쳐주면서 극적 긴장감도 능숙하게 조였다 풀었다 한다. 김용준은 “누가 나를 믿으면 그 압박과 부담감 때문에 계속 불안하고 초조하다”며 “신병이 상관을 꽉 믿고 있다는 게 제일 답답했다”고 했다.

관객 눈에만 보이는 나무의 혼령이기도 한 여인은 극의 상황과 흐름을 설명해주는 해설자 역할도 담당하는데 최희서(37)가 연기한다. 최희서와 손석구는 무명 시절과 다름없던 9년 전 각자 100만원씩 보태 ‘사랑이 불탄다’를 무대에 올린 인연으로 이번에 같이 하게 됐다. 신병과 상관이 과거 추억을 떠올릴 때 각각의 애인·아내 역도 소화한다. 당초 8월 5일까지 잡혔던 공연 일정은 ‘손석구 효과’로 관객이 몰리면서 12일까지 일주일 연장됐지만 일찌감치 매진됐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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